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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1월 30,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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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1월 21,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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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토영어' 몰락하고 ‘콩글리시’ 뜬다


영어의 미래를 재단할 칼자루는 인도가 쥐고 있다. 선진국의 업무를 대행하고 있는 인도의 한 콜센터.


‘잉글리시’ 지고 ‘콩글리시’ 뜬다?
중국·인도·한국 국력 커지면 국제공용어도 달라져

김형근의 미래, 미래사 이야기
영어의 몰락


몇 개월 전의 일이다. 국내 모 대학에서 교육학을 가르치는 캐나다 출신 한 교수를 만났다. 그런데 건네받은 그의 명함에서 재미 있는 사실을 발견했다. 영어로 된 명함에 휴대전화를 ‘핸드폰(hand phone)’이라고 표기해 놓았던 것이다.

사실 이상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핸드폰이라면 어디서나 통할 수 있는 영어다. 다만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점잖고 학식 있는 사람들은 핸드폰이라는 일본식 영어 대신 ‘모바일폰(mobile phone)’이나 ‘셀룰러폰(cellular phone)’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생각했던 필자에게는 약간 의외였다는 말이다.

하기는, 언어의 가장 기본적 속성이 의사전달이라는 커뮤니케이션 수단이라고 생각한다면 영어식이니 일본식이니 굳이 가릴 필요는 없다. 정통 영어를 필요로 하는 신문기사나 방송기사 속의 영어가 아니라면 대충 넘어가도 될 일이다. 더구나 그 교수의 부인이 한국인이라고 하니 능히 그럴 만했다.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사람보다 제2외국어로 쓰는 사람이 훨씬 많을 때 영어의 미래는 어떻게 변할까? 더구나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미국과 맞먹을 정도로 경제력도 막강한 국가의 국민들이라면 말이다. 조금은 강도 높은 표현으로 영어의 몰락을 짚어보고 싶은 것도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다.

분명 앞으로 영어의 지배력은 현저히 줄어들 것이다. 세계를 제패했던 미국이라는 제국이 몰락하기 때문에 모국어인 영어도 따라서 몰락할 것이라는 말이 아니다. 물론 그 위세는 다소 줄어들겠지만 아이스크림제국 미국은 앞으로도 상당기간 강대국으로 남을 것이다.

그러나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인구가 줄고, 제2의 언어로 영어를 사용하는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 자동적으로 영어의 위력은 사라질 것이며, 소위 스탠더드 정통 영어는 자취를 감출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다. 먼 장래의 이야기가 아니다. 현재 영어가 봉착한 문제다.

출산율 저하 등으로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인구는 급속히 줄어드는 데 반해 오히려 우리나라나 중국 등 영어를 제2외국어로 쓰는 인구가 늘고 있다. 이것이 왜 문제인가? 일본 사람들이 쓰는 영어가 본토 영어와 다르듯, 비영어권 사회에서 쓰는 영어는 정통 영어와 확연히 다를 수밖에 없다.

과학기술은 속도가 아찔할 정도로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 앞으로의 10년은 과거의 10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역동적이며 변화무쌍하다. 과거 30년 동안 이렇게 변해오면서 우리의 문화와 일상적 패턴까지 모두 바뀌었다. 10년 전만 해도 현재 우리가 들고 다니는 휴대전화가 이토록 빨리 진화하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거의 없다.

컴퓨터 또한 마찬가지다. 정보의 저장을 넘어 정보 교환 수단의 웹 2.0이 출현하리라고 생각한 사람도 별로 없었을 것이다. 엄청난 속도로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중국과 인도의 등장

과학과 기술의 변화와 더불어 우리의 변화를 가중시키는 것은 국제무대에서 중국과 인도의 등장이다. 이제 이 두 신흥 경제국을 빼놓고 세계의 미래를 논한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 돼버렸다. 비단 경제력에서뿐만 아니다. 10억 명을 넘는 엄청난 인구를 앞세운 두 국가가 세계화 대열에 나란히 동참할 때 세계의 문화, 그리고 세계의 언어지도가 어떻게 바뀔 것인지에 대한 예측은 충분히 가능하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화가 고개를 쳐들기 시작할 때만 해도 영어가 세계를 지배할 것이라는 데 의문을 제기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적어도 중국이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할 때까지만 해도 말이다. 그럼에도 영어는 여전히 국제 공용어다. 특히 과학기술분야에서 영어는 국적을 불문한 필수 언어다.

우리는 과학기술 관련 분야에 종사하고 있지 않더라도 그 영향 속에서 살고 있다. 바로 현대 과학기술의 상징인 인터넷 속에서 호흡하고 있다. 인터넷 공용어는 바로 영어다. 이를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 인터넷으로 대변되는 정보화사회의 위력은 앞으로 점점 더 강해질 것이다.

인간도 그 속에서 진화할 것이다. 그렇다면 영어의 위력도 점점 강해지고, 머지않은 장래에 영어는 그야말로 명실상부한 세계 공용어가 돼야 할 것 아닌가? 합당한 추론이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영어의 세력은 점점 강해질까? 답은 아니다. 10여 년 전의 일이다. 제주도를 국제자유도시로 만들면서 이 지역을 영어 공용화 지역으로 만들자는 논의가 활발히 전개됐다.

당시 분위기는 국제자유도시로 만들면 서양사람들이 떼거지로 몰려와 그야말로 홍콩이나 싱가포르를 능가하는 국제적 제주도가 되고, 제주도 주민들이 돈도 잘 벌 수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지금은 그러한 주장이 모두 물 건너 간 것으로 안다. 현실성이 없는 발상이었기 때문에…. 당시 제주도 영어 공용화 추진과 함께 전국적으로 영어를 공용화하자는 주장이 강하게 일었다.

이러한 주장에 앞장선 전직 외교관이자 모 대학 총장이었던 한 인사의 주장은 매우 그럴듯했다. “이제 영어는 필수다. 세계화에 걸맞은 미래의 인재는 영어에서 나온다. 영어를 따로 배우려면 엄청난 돈이 든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모두 똑같이 배울 수 있도록 차라리 공용화가 낫지 않겠는가?”

요즘 영어몰입교육으로 인해 영어교육에 수십 조원에 이르는 천문학적 비용이 들어가는 것을 감안하면 상당히 선견지명이 있는 주장이었다. 사실 요즘 영어교육은 영어 공용화 정책을 넘어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저기서 아우성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흐지부지 끝났다. 도를 넘은 발상인 데다 중국이 급부상하면서 중국어 열풍이 불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5년 전 서울 특정 지역에서 일부 철없는 부모들이 나중에 자식들이 커서 유들유들한 본토발음으로 유창하게 영어를 하도록 해주겠다면서 혀를 수술해줬다는 기사가 나와 우리의 이맛살을 찌푸리게 했다. 그들은 왜 그렇게 본토발음에 집착했을까? 영어 발음이 유들유들해져 본토인과 다를 바가 없게 되면 노다지라도 쏟아져 들어올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아니면 본토에서 아나운서라도 시키려는 것이 부모의 꿈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대통령인수위원회의 이경숙 위원장의 “아륀지” 발언은 두고두고 그의 화려한 경력에 먹칠하는 비난과 조롱의 대상이 됐다.

영어 공용화 주장부터 혀수술, 그리고 ‘아륀지 파문’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일들을 일단 좋은 눈으로 보자.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생존경쟁을 위한 몸부림으로 말이다. 생존을 위한 노력만큼 중요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문제가 있다. 그러한 치열한 노력이 과연 값어치가 있는 것이었을까? 과연 미래를 내다보는 판단이었을까?

영어는 교양언어로 전락

이들에게는 안타깝게도 머지않아 영어는 몰락한다. 표현이 너무 과하다면 말을 조금 바꾸자. 영어는 영향력이 점차 줄어들면서 쇠퇴해갈 것이다. 영어의 강세는 결코 계속되지 않는다. 영어는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사람들에 의해 유지된다. 영어를 말하는 사람은 여전히 많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처럼 필수가 아닌 교양언어의 하나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영어의 미래를 재단할 칼자루는 인도가 쥐고 있다. 또한 중국이 쥐고 있다. 결코 허언이 아니다. 영어의 중심축은 현재 정통 영국영어에서 미국영어로 옮겨가 있다. 이는 또다시 인도영어(인딩글리시)로 넘어갈 것이다. 이에 덧붙여 곧 중국영어(칭글리시)가 새롭게 등장할 것이다. 인도는 말할 것도 없고, 조만간 영어를 유창하게 말하는 중국사람이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인구보다 더 많아질 것이다.

우리나라도 상당한 인구가 영어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영어 강국이다. ‘콩글리시’도 대단한 영어가 된다. 일본식 영어가 국제무대에서 위력을 발휘한 지는 오래다. 이처럼 모국어 인구에 의한 영어는 위력을 잃게 되고, 오히려 아시아에 의해 영어의 명목이 유지될 것이다.

지난해 7월 말레이시아의 부총리이자 교육부 장관은 기자회견에서 정부가 2012년부터 과학과 수학을 영어로 가르치는 정책을 포기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말레이시아 정부는 영어몰입교육의 일환으로 2003년부터 과학과 수학을 영어로 교육해 왔다. 왜 과학과 수학인가? 간단하다. 먼저 수학부터 말하자면, 수학은 모든 과학의 기초다.

광범위한 물리학과 천문학을 비롯해 최근에는 생명공학의 하이라이트인 단백질 연구에서도 수학은 당연히 필수다. 뿐만 아니다. 증권을 비롯해 각종 금융분야에서 분석과 판단을 내리는 데도 수학은 광범위하게 쓰인다. 과학에 대해서는 부연설명이 따로 필요 없다. 미국이 과학기술을 주도하는 한 영어는 과학기술 분야의 공용어라는 점이다.

이런 상황에서 말레이시아의 영어 교육은 다시 말해 국제화에 걸맞은 인재를 양성하겠다는 것이었다. 우리나라도 한때 이를 본받아 영어몰입교육을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2008년도 영어몰입교육 논의에서 몰입교육에 찬성한 많은 정치가와 학자들이 그 사례로 들었던 나라가 바로 말레이시아였다.

그런데 말레이시아가 서둘러 이 정책을 포기하고 나선 것이다. 말레이시아는 왜 수학과 과학의 영어교육정책을 포기하기로 결정했을까? 간단하다. 학생들의 과학·수학 성적이 그렇게 향상되지 않았으며, 기대했던 만큼 국제화에 걸맞은 인재양성 효과도 내지 못했다는 것이 이유다.

또 다른 이유는 도시 학생들에 비해 말레이어를 주로 사용하는 농촌의 학생들에게 이런 형태의 수업은 오히려 부담만 가중시킨다는 것이었다. 어려운 개념을 영어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구태여 영어로 가르쳐야 하는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말레이시아는 그 영토 상당부분이 영국의 식민지였다.

영어를 공용어로 쓰지는 않지만, 전통적으로 영어가 널리 쓰였다. 그런 나라에서도 과학과 수학을 영어로 가르치는 것에 문제가 나타났다는 결론이다. 우리나라에서 과학과 수학을 영어로 가르치면 어떤 결과가 나타날까? 일부 학자는 역사를 포함해 국어를 뺀 전 과목을 영어로 가르치자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이 정도면 정책 입안이라기보다 영어 전도사라는 편이 더 어울릴 것이다. 어쨌든 우리나라도 엄청난 에너지를 영어에 투자하고 있다. 영어의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중요한 변수는 우선 두 가지다. 모국어 인구다. 그리고 세계화의 주축이 되고 있는 경제력의 변화다. 따라서 가까운 장래에 영어에 가장 극적 변화를 초래할 요인은 우선 영어 사용자의 구성 비율이다.

영어를 모국어로 하는 사람들보다 제2언어로 쓰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는 추세이기 때문이다. 통계에 따르면 영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사람은 현재 8억2300만 명에 이른다. 그 가운데 제2언어로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4억9500만 명으로 60%에 달한다. 다시 말해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는 사람은 본토인보다 외국인이 더 많다.

문제는 영어를 제2언어로 사용하는 사람들의 영어는 정통 영어와 많은 차이를 보인다는 것이다. 영어를 중국어와 결합해 사용하는 싱가포르의 경우가 좋은 예다. 싱가포르에서 사용하는 영어는 단어·문법·발음 등에서 정통 영어와 큰 차이를 보인다. 영어를 제2언어로 활용하는 유럽 대륙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런 상태가 지속되면 영어는 과거 라틴어가 걸어온 운명을 따르게 될 것이라고 예측하는 언어학자들이 많다. 영국의 응용언어학자 데이비드 그라돌(David Graddol)도 그 중 한 사람이다. 영어의 미래연구 권위자인 그는 앞으로 영어를 말하는 사람은 늘지 모르지만 그 위력은 상당히 줄어들 것이라고 예견했다.

더불어 영어의 미래는 복잡하고 상당한 문제를 안게 될 것이며, 라틴어와 똑같은 변화를 거칠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라돌은 나아가 중국어가 아시아 다수 국가와 유럽·미국 등지에서 새로운 필수 언어로 부상할 것이며, 중국어에 이어 인도의 힌두어, 아랍어, 그리고 스페인어가 부상하면서 영어는 이러한 힘센 언어들 가운데 하나로 남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라돌의 주장은 한마디로 ‘세계언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현재 막강한 위력을 발휘하는 영어와 같은 언어는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중국어·힌두어·아랍어·스페인어 부상

로마제국의 등장으로 세계언어가 되었던 라틴어는 서기 300년쯤부터 500년 동안 여러 지역의 사투리로 갈라진 뒤 800년쯤에는 서로 소통할 수 없는 언어로 바뀌었다. 오늘날 이탈리아·스페인·프랑스 등의 언어가 바로 그런 과정을 거쳐 태어난 것이다. 이처럼 영어도 제2언어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갈수록 늘어남에 따라 라틴어처럼 지역마다 다른 모습의 언어로 변질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얄궂게 표현해서 영어가 갈기갈기 찢어질 수 있다는 말이다. 그나마 영어의 미래를 인구 10억 명에 육박하는 인도에 걸어보는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다. 인도는 영어를 제2의 모국어로 쓰고 있기 때문에 적어도 정통 영어는 인도에서 그 명맥을 유지하게 될 것이라는 추측이다. 물론 이처럼 영어가 라틴어처럼 전혀 다른 여러 개의 언어로 분화할지, 아라비아어처럼 방언은 있지만 단일언어로 존속하게 될지 확실하게 예측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영어가 어떤 형태로든 변화할 것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이는 영어의 지배력 약화를 의미한다. 2008년 2월 과학 학술지 <사이언스>에 실린 논문에서 영국 리딩대의 마크 페이절 교수는 새로운 언어가 형성되는 과정을 분석했는데, 앞으로 100년 이내에 영어의 새로운 모습이 드러나게 될 것 같다고 주장했다.

영어의 암울한 미래는 비단 외부적 요인만이 아니다. 본토에서도 문제는 심각하다. 미국은 원래 다민족, 다문화 국가다. 원래 안고 살았던 문제다. 그러나 다시 최근 수없이 몰려드는 이민자로 인해 정통 영어가 사라지고 있다는 한숨 섞인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정통 영어를 쓰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하소연이다.

인터넷 사회가 지속되는 한 영어는 영원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그 속을 들여다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인터넷 인구는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 그러나 영어로 커뮤니케이션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더구나 인터넷 영어는 또 하나의 변질된 영어에 불과하다. 구글(Goole)이 사활을 건 통역기가 개발되면 인터넷에서마저 영어는 거의 필요 없는 존재가 된다.

현재의 구글 통역기는 수준이 형편없다. 그러나 점차 나아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우리나라 말과 언어체계가 다른 영어는 그렇지만 일본어의 경우는 상당히 쓸 만하다. 이러한 이유에서 ‘인터넷 전도사’ ‘인터넷의 아버지’로 통하는 빈트 서프 구글 부회장은 2007년 서울을 방문했을 때 영어의 미래에 대한 필자의 질문에 “인터넷에서 영어의 득세는 계속되지 않는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인터넷에서 영어의 득세가 사라진다는 것은 영어의 몰락을 의미하는 것과 같다. 어떤 이유로든 영어가 지금처럼 위력을 발휘하지는 못할 것이다. 인터넷사회가 진전되더라도 영어는 점차 세력을 잃어갈 것이다. 그렇다면 자존심 상하는 영어 공용화 논의도, 혀수술도 자취를 감출 것이다. 찢어지게 가난한 인도인의 구강구조를 닮기 위해 혀를 수술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륀지 파문’도 자취를 감출 것이다. 이제 영어가 과연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진지한 성찰이 필요할 때다. 부모의 등골을 휘게 만드는 수십 조원에 달하는 영어몰입에 들어가는 비용도 함께 말이다. 영어정책과 관련해 뒷북이나 치는 우려를 범해서는 안 된다.

영어의 알파벳은 계속 남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영어의 강세를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핸드폰은 훌륭한 영어다. 앞으로 ‘무전여행’이 영어로 뭔지 잘 모르면 ‘no money travel’이라고 해도 된다. 상대가 모르면 말고.<월간중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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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근 과학 칼럼니스트.

미래사연구가. 부산대 졸업. 前 <코리아헤럴드> <중앙일보> 기자.
인문학과 과학이 결합한 각종 칼럼을 통해 과학의 대중화에 힘쓰고 있다.

[6·25 전쟁 60년]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16) 1·4후퇴 피란민


1951년 1월 초 중공군의 공세로 아군이 한강 남쪽으로 밀려 내려가게 되자 미군은 어린이와 노약자를 비행기에 태워 남쪽으로 보내는 작업에 들어갔다. 1·4 후퇴 당시 한 어린아이가 미 공군 수송기에 오르고 있다. [백선엽 장군 제공]


외침 때마다 수도를 버렸던 조선 … 우리도 다를 바 없었다


한강에 다리가 놓였다. 고무보트 위에 판자를 얹어 만든 임시 부교(浮橋·뜬다리)였다. 6·25 개전 초기에 한강 인도교를 끊음으로써 수많은 사람을 적 치하(治下)에 그대로 남게 했던 그런 실수는 다행히 반복되지 않았다. 미 제1 기병사단의 포병사령관 찰리 파머 준장이 마포에 이 부교를 만들었다. 미 1기병사단의 공병이 그 작업을 했다. 파머 준장은 그 다리를 감독하는 지휘관이었다.

부교는 두 개였다. 개전 초기 북한 인민군 치하에서 고생했던 사람들이 등과 머리에 짐을 잔뜩 이고 지고 강을 건넜다. 전쟁 발발 직후 인도교를 폭파할 때 빚어졌던 혼잡은 없었다.

무작정 남쪽으로 내려가는 민간인의 행렬, 사병과 무기를 실은 군용 트럭들이 줄을 이어 건너면서 두 줄로 난 다리는 붐볐지만 그나마 질서가 유지됐다. 내가 탄 지프도 그들과 함께 강을 건넜다. 목적지는 안양이었다.

1951년 1월 2일 안양의 한 방직공장에 국군 1사단 이동 지휘소가 만들어졌다. 나는 그곳을 향하고 있었다. 사단의 주 병력은 한강 남쪽, 지금의 동작동 국립묘지와 중앙대가 있는 흑석동 사이에 방어 진지를 구축했다. 그곳에 전투 부대를 배치한 후 나는 안양을 향해 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내가 탄 지프는 어느덧 피란민이 하염없이 걷고 있는 길을 지나고 있었다. 피란 행렬이야 전쟁 발발 이후 늘 보아 오던 것이었지만 왠지 느낌이 달랐다. 차는 사람 틈에 끼여 있어서 속도를 낼 수 없었다.

차 옆으로 지나가는 풍경이 말이 아니었다. 영하 15도의 추운 날씨에 올망졸망한 아이들을 데리고 피란길에 나선 한 가족이 눈에 띄었다. 아이들은 지나가는 지프를 그저 바라다보고 있었다. 그 어린아이들의 눈망울에 지프에 탄 내 모습은 어떻게 비쳤을까.

인도교가 폭파됐을 때에 비해 피란민들이 더 안전하게 강을 건넜다는 점이 위안일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허무하게 또 우리의 수도를 적의 수중에 넘겨준 것이다. 그들은 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엄동설한에 다시 집을 나선 것이다.

나는 그날, 한강을 걸어서 남하하는 수십만의 시민을 바라보며 무거운 죄책감을 느꼈다. 지금도 나는 조선 때 만들어진 길이 17㎞의 서울 성곽이 지닌 의미를 되새기곤 한다. 그 성곽을 쌓기 위해 많은 사람이 동원됐을 것이다. 적지 않은 돈을 들여 성곽을 쌓았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의 왕조는 수도를 지킨 적이 없었다. 왜군이 쳐들어 왔던 임진왜란 때 조선 왕조는 수도를 지키면서 결사(決死)의 항전 의지를 내비친 적이 없었다. 북쪽으로부터 여진족의 청(淸)이 쳐들어 왔을 때 임금은 신하와 함께 백성과 수도를 지키겠다는 결연한 싸움의 의지를 내비치지 않았다.

내 지식 속의 조선 왕조는 적이나 반란군이 서울에 들이닥칠 경우 늘 도망치기에 바빴고, 적의 수중에 수많은 백성의 삶을 그대로 버려두고 제 목숨과 재산만을 보전하기에 급급했다. 이 피란민의 행렬에서 나를 바라보는 저 어린아이들의 눈에 나 또한 도망치는 왕조의 한 군인으로만 비쳤을지도 모른다. 6·25가 터졌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정부는 “영용(英勇)한 국군이 적들을 물리치고 있으니 안심하라”는 말을 방송국 녹음 테이프에 걸어 놓은 뒤 먼저 남행길에 나섰다. 강을 건너 남쪽으로 내려가는 한강 인도교도 차분하게 앞뒤를 따져보지도 않은 채 섣불리 폭파했다.

북진에 북진을 거듭하다 어느새 밀리기 시작한 전선이다. 국군과 연합군은 한강에 임시로 만들어진 부교를 통해 다시 남쪽으로 밀려 내려가기에 바빴다. 안양의 사단 이동 지휘소로 향하는 차 속에서 내 마음은 줄곧 무겁기만 했다.

준비가 없는 나라의 운명은 뻔하다. 비상시를 예견하고 위험을 미리 대비한 정부와 그러지 못한 정부는 다르다. 조선왕조와 대한민국은 그런 점에서 닮았다. 위기를 상정하고 그에 미리 대비하지 못한 정부다. 대한민국이 건국한 지 불과 2년이 지나지 않아 침략을 당하는 바람에 미처 대비할 여유가 없었다는 사람도 있지만 내가 볼 때 그것은 핑계다. 좀 더 침착했더라면 북한의 남침을 충분히 예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그 위험에 대비하지 못했다. 언제까지 더 밀려야 할까. 나는 적을 물리치고 다시 수도를 탈환할 수 있을까. 답답하기만 했다.

백선엽 장군

[6·25 전쟁 60년]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⑮ 밀리고 밀리는 전선


국군과 미군, 연합군을 한강 이남까지 밀어낸 중공군의 3차 공세는 1950년 12월 하순에 본격적으로 불이 붙었다. 사진은 임진강 부근까지 내려온 중공군 포병들이 12월 31일 국군 등이 포진한 남쪽을 향해 포격을 가하고 있는 모습이다. [백선엽 장군 제공]


역부족이었다, 이대로 서울을 다시 내줘야 한단 말인가


전쟁에서 적에게 한 번 등을 보이면 이를 되돌리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거센 물결에 떼밀려 하염없이 떠내려 가야만 한다. ‘크리스마스 공세’로 소강상태에 있다가 섣불리 중공군을 밀어붙이려 했던 게 아무래도 탈이었다. 힘겹게 들어섰던 평양을 다시 적의 수중에 내주고 밀리기 시작한 지 2주쯤 지났을까. 정신없이 내려오다 보니,내가 그해 6월 25일 적을 처음 맞았던 임진강이 다시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개전 당시 내가 맡았던 지역이다. 그 산과 강이 내게는 너무 친숙했다. 준비 없이 맞았던 북한군의 침공이 떠올랐다. 전의(戰意)가 다시 불타올랐다.

그러나 우리 1사단에는 하늘이 내려준 시간, 천시(天時)가 맞지 않았다. 그해 겨울이 유난히도 추웠던 탓에 임진강 강물은 이미 희고 딱딱한 얼음덩어리로 변해 있었다. 병사들을 동원해 두드려 봤다. “쾅-쾅-” 소리만 날 뿐 사람의 힘으로 깨뜨리기에 역부족이었다. 물이 얼어붙은 강은 적에게 더 이상 장애물이 아니다. 저 북방으로부터 밀려오는 중공군의 공세는 이 꽁꽁 얼어붙은 강을 쉽게 건널 게 뻔했다. 단단하게 얼어붙은 땅바닥도 참호를 파는 데 큰 장애였다. 강물도 얼어붙고, 땅바닥도 굳게 얼어붙은 임진강 전선은 그저 불안하기만 했다.

1950년이 저물던 12월 31일 늦은 오후에 중공군은 공세를 다시 시작했다. 마침 그날 낮에 당시 한국은행 이사였던 장기영(작고, 한국일보 창업자)씨와 재무차관이었던 송인상(95·현 효성그룹 고문)씨가 연말연시 일선장병 위문차 찾아 왔다. “은행원들이 국군을 위로하기 위해 직접 김치를 담갔다”면서 커다란 김치 항아리 두 독을 싣고 왔다. 심신이 지친 장병에게 이런 선물은 얼마나 반가운지 모른다. 예하부대에까지 김치를 돌렸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짧은 즐거움이었다.

저녁 무렵이 되자 내려앉는 어둠 속에서 중공군의 공격이 시작됐다. 특유의 피리와 꽹과리 소리가 난 뒤에 기관총과 박격포 사격이 시작됐고, 이어 적들이 나타났다. 엄청난 수였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적군이 들이닥치면서 전면에 있던 12연대가 뚫리기 시작했다. 동료의 시체를 넘고 넘어 물밀 듯이 전진하는, 전형적인 중공군식 인해전술이었다.

우리 1사단과 인접 국군 6사단 사이의 경계인 전투지경선(戰鬪地境線)이 먼저 밀렸다. 우리 쪽에서는 12연대가 나가 있던 곳이다. 눈앞이 캄캄했다. 15연대를 예비진지에 투입한 뒤 전황을 파악하기에 급급했다. 밤이 깊어지면서 앞에 나가 있던 부대와는 통신도 끊겼다. 11연대는 그대로 버티고 있었으나 12연대와 15연대는 걷잡을 수 없이 밀리고 있었다.

중공군의 돌파를 저지하기 위해 나는 공병대와 통신대 병력까지 투입했으나 역부족이었다. 낙동강 전선에서의 선전(善戰)과 평양 1호 입성 등 1사단이 쌓았던 전공이 신기루처럼 여겨졌다. 역전의 1사단도 무너지다니….

참모들과 미군 고문관들에게 모두 후방으로 이동하도록 했다. 나와 주요 참모 몇 사람만 파주군 법원리 근처 초등학교에 있던 사단 지휘소에 남아 후퇴 상황을 점검했다. 그때 나는 엄청난 좌절감과 허탈감에 빠져 기력을 거의 상실했다. 내 막사를 드나들며 전선과의 교신을 시도하던 통신참모 윤혁표 중령은 훗날 당시의 나를 ‘마치 넋이 나간 사람 같았다’고 표현했다. “전화기를 손에 쥐여주면 통화를 한 뒤 제자리에 놓지 못하고 떨어뜨릴 정도”였다고 했다. 그는 또 내가 무전기를 내려놓은 뒤 방금 했던 말을 계속 반복했다고 한다. 혼잣말로 중얼중얼거리는 모양이 마치 실성한 사람 같았다고 했다. 나는 아무런 정신이 없었던 것 같다. 그저 머릿속이 텅 비는 듯한 느낌이었다. 머릿속으로 ‘휭-’ 하는 소리만 스쳐갔던 기억이 있다. 감당할 수 없는 충격으로 그만 정신을 놔버리자 그런 상태에 빠져든 것인지 모르겠다. 그저 캄캄했다.

그때 누군가 나를 번쩍 들어올렸다. 말라리아에 시달리던 내가 오한에 몸을 떨고 있을 때 늘 버너를 갖고 와 커피를 끓여 주던 작전처 미 고문관 메이 중위였다. 젊은 나이에 비해 머리카락이 희고 키가 컸던 그는 나를 지프로 옮기면서 “사단장님, 전쟁을 하다 보면 질 수도 있고 이길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라고 말했다. 부끄럽지만 물러나야 할 때였다. 그의 말이 맞았다. 전쟁에서는 질 수도 있는 것이다. 다음을 기약해야 한다. 지프에 태워진 나는 남으로 달려 한강변에 도달했다. 그러나 울컥하면서 다시 솟구쳐 오르는 분함이 있었다. 이대로 서울을 다시 내줘야 한다는 말인가. 그러나 그것은 눈앞에 닥친 엄연한 현실이었다.

백선엽 장군

[6·25 전쟁 60년]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⑭ 전시 사단장의 하루


중공군 2차 공세에 밀려 후퇴를 거듭하면서 마음고생이 심했던 백선엽 국군 1사단장(가운데)이 1951년 초 경기도의 한 초등학교에 마련된 사단본부에서 참모·고문관과 작전회의를 마친 뒤 촬영한 모습이다. [백선엽 장군 제공]

말라리아로 잠 못 든 새벽, 헤어진 노모·아내·딸 얼굴이 …


말라리아는 고통스럽다. 낮에는 오한이 심하게 닥친다. 그래도 1950년 12월 당시에는 겨울이라서 증상이 덜했다. 여름의 말라리아는 지독하다. 후퇴를 거듭하던 시점에 맞았던 말라리아는 때가 비록 겨울이었지만 심적으로 느끼는 고통의 강도는 여름보다 더했던 것 같다.

이럴 때면 늘 손에 조그만 버너를 들고 나타나는 사람이 있다. 낙동강 전선에서부터 국군 1사단에 배속돼 늘 나와 함께 생활하던 미군의 메이 중위였다. 그는 내 막사로 들어와 먼저 버너에 불을 피운다. 버너 밑에 달려 있는 조그만 펌프를 밀고 당기는 일을 반복하다 보면 불이 피어 오른다. 이어 그는 조그만 코펠을 올려놓고 물을 끓였다. 그러고서는 조그만 잔에 커피를 타 왔다.

“좀 어떠시냐. 뜨거운 커피를 마시면 좀 진정이 될 것”이라고 위로를 건넸다. 그가 타주는 커피는 적잖은 위안이었다. 차가운 겨울에 찾아온 말라리아의 오한이 좀 가시는 기분이 들고는 했다.

국군 1사단에는 미군 고문관들이 많았다. 포병과 공군 연락 장교는 당연히 미군이었다. 그 당시 한국군은 이 분야의 자체 역량을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통신·정보·병참 지원을 하는 후방 고문 등도 미군이었다. 사단은 종별 보급 명칭을 ‘클래스(CLASS)’라 부르는데 1이 식량, 2가 의류, 3이 기름, 4가 비품, 5가 탄약이다.

당시 국군 1사단은 미군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다. 각 분야의 미군 고문관들이 사단에 배속돼 8군 사령부 등과의 교신을 통해 각 분야의 지원을 중개했다. 나는 그래서 이 고문관들과 하루 종일 같이 지내는 편이었다.

전선의 부대를 시찰하거나 적정(敵情)을 직접 살펴보기 위해 전방의 고지를 둘러보는 일도 참모 및 미 고문관들과 함께했다. 아침에 기상한 뒤 이어지는 것은 각종 전선 보고를 검토하는 일이다. 그때 미 고문관들과의 회의가 시작된다.

사단 전체의 탄약과 식량에 관한 사항부터 병력의 이동·배치 등 모든 사항을 점검하는 자리다. 내가 미국인이 아닌 바에야 그들과의 소통이 완벽할 수는 없다. 그래도 정해진 군사 전문 용어가 있었고, 또한 그를 매일 반복해서 듣다 보면 귀에 매우 익숙해진다. 소통에는 큰 지장이 없었다.

사단의 인사 정보 작전 후방을 담당하는 한국 참모진과의 회의도 수시로 열린다. 정황에 따라서는 해당 분야의 참모만을 직접 부르거나 찾아가 즉석에서 회의를 한다. 이러다 보면 눈코 뜰 사이 없이 하루가 지나간다.

사단이 적에 밀려 후퇴하는 중에는 마음이 더 바빠진다. 병력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해 절치부심해야 한다. 적이 어디쯤 오고 있는지 파악하고 그에 대비해 여러 가지 작전 계획을 수립해야 한다. 모든 신경을 이곳에 집중하다 보면 하루의 해는 금세 서산 너머로 사라지고 만다.

나는 밥을 잘 먹고, 잠도 잘 자는 편이다. 당번병이 가져다 주는 식사는 대개 10분이면 뚝딱 해치운다. 전쟁 중에 익혔던 식사 습관이라서 지금도 밥을 빨리 먹는 편이다. 요즘에도 설령 격식 있는 자리에 나간 경우라도 나는 음식을 금방 먹어 치운다. 같은 자리에 앉았던 사람들이 조금 이상하게 생각할 정도다. ‘저 노인, 식사 한번 빨리 하는구먼’이라는 눈치다. 전장에서 익힌 습관은 아주 오래 이어지는가 보다.

전쟁 중의 사단본부는 흔히 주둔한 지역의 학교 건물에 차려진다. 내 숙소는 보통 선생들이 숙직을 하는 조그만 방에 마련한다. 학교 뒤편의 조용한 선생 숙직실에 들어가는 시간은 대개 밤 11시쯤이다. 분주하기만 했던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나름대로 혼자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유일한 때다.

중공군의 공세에 밀려 사리원과 임진강으로 후퇴했을 당시 말라리아를 앓았던 나는 늘 부관이 가져다 준 말라리아약 키니네를 한 움큼 집어삼킨 뒤 잠에 들었다. 그래도 가끔 덜덜 떨리는 것을 느끼면서 잠에서 깼다. 자리에 누워서 올려다보는 창에는 늘 어둠이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 동이 트기에는 아직 이른 새벽녘이었다.

때로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많이 자제하는 편이지만 이때에는 개인적인 생각을 하게 된다. 전쟁이 발발하던 50년 6월 25일 집을 나서면서 헤어진 노모와 아내, 그리고 세 살 난 딸의 안위가 우선 걱정이었다. 그들의 얼굴이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애써 그런 생각들을 지우려 노력했다. 전쟁 통에 지휘관이 가족 생각에만 파묻힐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런 말이 있다. ‘창을 베고 누워 아침을 기다린다(枕戈待旦)’. 그때 나와 전선을 함께 지켰던 모든 군인들, 그들의 심정은 바로 이와 같았을 것이다.

백선엽 장군

[6·25 전쟁 60년]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⑬ 12월 맥아더의 철수 결정







백선엽 사단장이 이끄는 국군 1사단이 1950년 12월 5일 평양 동부 지역을 지나 남으로 후퇴하고 있다. 중공군 2차 공세에 밀린 국군 1사단은 사리원을 거쳐 임진강까지 퇴각했다. 곧이어 시작된 중공군 3차 공세로 이듬해 1월 4일 서울을 공산세력에 다시 내준 것이 ‘1·4 후퇴’다. [백선엽 장군 제공]


미군, 퇴각하며 군수품 태워 … 평양은 화염·연기로 뒤덮여


전황(戰況)이 다급해졌다. 1950년 12월 초, 국군 2군단이 무너지면서 동쪽으로 내려오는 중공군의 기세가 막힘이 없었고, 그 서쪽을 방어하던 미 2사단이 큰 타격을 받고 넘어졌다. 청천강 방어선을 지키기 힘든 상황이 됐다. 이제 평양과 원산을 잇는 라인에 방어선을 새로 설치해야 했다.


도쿄에 있는 맥아더 총사령관이 서부 전선을 지휘했던 월턴 워커 8군 사령관과 10군단장으로 동부 전선의 공격을 이끌었던 에드워드 알몬드 소장을 소환했다. “평양과 원산을 잇는 선에 방어선 설치가 가능하냐”고 물었다. 두 사람은 “불가능하다”고 대답했다.

맥아더 사령관은 이때 연합군의 38선 이남 철수를 결정한다. 1950년 12월 3일의 일이다. 그해 6월 25일 거침없는 북한군의 공세에 쫓겨 낙동강까지 밀렸다가 기사회생해 38선을 넘은 뒤로부터 2개월여 만에 우리는 다시 그 남쪽으로 밀려나게 된 것이다. 통한(痛恨)이라고 해야 할까, 뭐라고 해야 할까. 먼저 그런 감정이 솟구쳐 오르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곳은 전장(戰場)이다. 감정을 내고 그것을 다시 억누르는 데 사용할 시간이 내게는 부족했다. 챙길 것을 먼저 챙겨야 한다. 정신을 다시 가다듬기로 했다. 후퇴하는 때의 상황은 내게 감정을 다독거려야 하는 사치스러운 여유를 주지 않는다.

워커 미 8군 사령관은 “아군의 다른 모든 부대가 청천강을 넘어 철수를 마칠 때까지 이들을 엄호하라”는 명령을 내게 내렸다. 북진한 뒤 운산과 태천에서 후퇴를 하면서도 국군 1사단은 그대로 편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무너지지 않은 병력과 화력을 사용해 아군의 철수를 돕는 엄호부대(covering force)로서의 임무를 부여한 것이다.

엄호부대로서의 임무를 마치고 1사단도 남을 향해 퇴각하는 시점에 이르렀다. 이 해 10월 아군으로서는 최초로 입성한 평양을 지나야 했다. 마음속이 편할 리 없었다. 언제 이 평양에 다시 올 것인가라는 생각만 들었다. 12월 5일 해가 진 차가운 날씨 속에 동평양을 지날 무렵이었다.

평양의 하늘에는 연기가 자욱했다. 평양 곳곳에 만들어졌던 미군 보급소에서 퇴각하면서 미처 가져가지 못한 막대한 양의 군수품과 유류(油類)가 불에 타고 있었다. 여기저기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와 화염으로 평양의 모습은 기괴했다. 불타는 물자 더미 사이로 사람들이 뛰어들고 있었다. 의복과 식품 등 필요한 물건들을 하나라도 건져내기 위해서였다. 피란 대열에 섰던 사람들도 있었고 주민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퇴각하던 부대원들도 하나둘씩 그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들을 제지하는 경비병들의 사격 소리도 가끔 들렸지만 사람들을 다 막지는 못하는 모양이었다. 요행히 물자 몇 개를 건진 사람들의 표정은 밝아 보였다. 불에 타는 막대한 물자를 보고 욕심을 내지 않는다면 그것도 이상한 것이다. 무개화차에서 내려지지도 않은 신형 전차 10여 대가 불길에 휩싸인 것을 보는 순간에는 나도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합군은 12월 11일 임진강 방어선으로 철수했다. 1사단은 그들의 철수를 마지막까지 지켜줘야 하는 엄호부대의 역할을 다시 맡았다. 그들이 철수하는 도로와 그 주변을 면밀하게 지켜야 했다.

그때 이상한 소문이 나돌고 있었다. ‘미군이 철수할지도 모른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난감했다. 북에서는 정확한 규모를 짐작할 수 없는 중공군이 밀려 내려오고 있었다. 적유령을 넘은 중공군이 거침없이 운산과 군우리, 청천강과 평양을 거쳐 남으로 내려가고 있는 와중에 미군의 철수라니.

말을 해준 사람은 미 27연대장 마이켈리스 대령이었다. 개전 초기 낙동강 전선에서 함께 적을 막아냈던 절친한 사이였다. 철수 길에 1사단이 엄호부대를 맡았다는 소식을 듣고 그가 사리원 남쪽에 있던 나를 찾아온 것이다. 반가운 인사를 마친 뒤 그는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귀띔을 했다. 마음이 급해진 나는 소문의 진위를 확인하려 그를 다그쳤다. 그는 “우리는 군인이다. 소문에 구애받지 말고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자”는 말만 했다. 철수한다는 것인지 아닌지 분명치 않았다. 그로서도 대답을 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다.

거침없이 밀려오는 중공군을 앞에 둔 시점에 듣게 된 소문 치고는 너무 고약했다. 우리 사단이 6·25 개전 초기에 맡았던 임진강 지역으로 내려온 것은 12월 15일이다. 내게는 낯익은 곳이었지만 마음은 불안했다. 저 앞으로 넘어오는 중공군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 미군은 철수하는가. 개전 이후 나를 쫓아다니던 말라리아가 재발했다. 피로가 겹치고 불안감으로 신경이 날카로울 때 늘 찾아오는 병이었다. 오한이 나면서 온몸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백선엽 장군

[6·25 전쟁 60년] “운산 수수밭서 격투 끝에 첫 중공군 포로 붙잡아”


1950년 10월 24일 평북 운산에서 중공군 포로 1호를 붙잡은 김대일씨. [신인섭 기자]

6·25를 말한다 - 나의 증언석 낙동강서 입대한 학도병 1기 78세 김대일씨


백선엽 예비역 대장의 회고록 ‘내가 겪은 6·25와 대한민국’이 연재되면서 전쟁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했던 사람들의 증언이 잇따르고 있다. 이에 중앙일보는 전쟁을 겪었던 세대들의 다양한 경험담을 증언석 형식을 통해 싣기로 했다. 동족상잔의 비극적 속내를 기록으로 남겨 후세에 전하기 위해서다. 1950년 10월 24일 운산전투에서 첫 중공군 포로를 잡은 김대일씨의 증언을 먼저 싣는다. 첫 중공군 포로 를 잡은 경위가 구체적인 증언으로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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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고양에 살고 있는 6·25 참전용사 김대일(78·사진)씨는 1950년 10월 24일 평북 운산 전선에서 중공군 포로를 잡았다. 우리가 잡은 중공군 포로 1호다. 당시 백선엽 사단장이 이끌던 국군 1사단의 15연대(연대장 조재미 대령) 수색대로 최전방 정찰 임무를 수행하면서다. 이 때문에 중공군의 참전이 비로소 확인됐다. 그는 50년 7월 4일, 학도병 1기로 낙동강 전선에서 입대했다.

김씨는 “중앙일보에 연재되고 있는 백선엽 장군 회고록에서 운산전투 상황이 나오는 것을 보고 그 당시에 15연대 수색대가 세웠던 공로를 꼭 기록에 남기고 싶어 중앙일보에 연락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의 증언을 바탕으로 당시 상황을 되살려 본다.

“국군 15연대 수색대는 약 60명으로 짜여 있었다. 포로를 잡기 하루 전인 10월 23일 운산에서 머문 뒤 24일 아침 7시쯤 수색에 나섰다. 내 옆에는 박근영이라는 민간인이 함께 있었다. 그는 권투 선수 출신이다. 유명 가수 현인(작고)씨와 함께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활동했던 사람이다. 주먹 깨나 쓰던 사람이었는데, 권투를 할 때 받았던 충격으로 몸 상태가 그리 좋지는 않았다.

박근영씨는 서울에서 살다가 전쟁이 터진 뒤 북한 인민군에게 잡혀 평양까지 끌려갔다 탈출했다. 우리 부대가 평양에 입성했을 때 그를 만나게 됐다. 갈 곳이 없었던 박씨는 우리 연대를 따라다녔다. 전쟁 통이라 어수선한 분위기여서 그런 게 가능했다. 박씨는 상하이에서 살았기에 중국어를 할 줄 알았다. 그는 10월 하순 이후 수색대와 자주 동행했다. 운산 지역으로 북상하면서 “중공군이 참전했다”는 소문이 분분했기 때문이다. 수색대가 혹시 중공군을 발견할 경우 통역이 필요했기 때문에 그를 앞세우고 다녔다.

수색대가 북쪽의 온정리 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는데 조그만 다리가 보였다. 그곳을 건너 1㎞쯤 지났는데 이상한 기척이 났다. 길가에는 어른 키만 한 수수밭이 있었는데 바람이 불면서 수수가 한쪽으로 기울었다. 그 순간 앞에 섰던 누군가가 “적이다”라고 외쳤다. 박씨와 나는 수수밭 쪽을 바라봤다. 북한군과는 다소 다른 차림의 병사 두 명이 보였다. 한 사람은 로켓포를 지니고 있었다. 그때 다른 한 명의 병사가 수수밭 저쪽으로 튀어나갔다. 도망을 쳤던 것이다. 박씨와 나는 놀란 채 우리를 바라보고 있던 병사 하나를 덮쳤다. 소총과 같은 개인 화기가 그에게 없었던 게 천만다행이었다. 그는 로켓포만 가지고 있어서 우리 두 사람에게 총격을 가하기 힘들었던 모양이다.

박씨가 그에게 뭐라고 몇 마디 물어본 것 같았다. 돌아오는 대답은 분명히 한국어는 아니었다. 두 사람이 중국어로 서로 뭐라고 말을 나눴다. 중공군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다른 전선에서는 어떤지 몰라도 국군 1사단 15연대 전면에서는 어쨌든 처음 발견한 중공군이었다.

그때 갑자기 온정리 쪽의 고지에서 포탄이 날아들기 시작했다. 멀리서 보고 있던 중공군이 포격을 가했던 것으로 보인다. 길가로 나와 있던 박씨와 나는 포로를 붙들고 수수밭으로 들어갔다. 포격이 멈추지 않았다. 그대로 있으면 포탄을 맞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박씨와 나는 포로의 멱살을 한쪽씩 붙잡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는 건너왔던 다리를 향해 뛰었다. 중공군 포격은 계속 우리 뒤를 쫓아 오고 있었다. 다리를 무사히 건넜다. 수색대가 모여 있는 쪽으로 가서 포로를 건넸다. 중공군 포로가 로켓포를 가지고 있던 점으로 봐서 그는 운산 북쪽에 진출해 있던 중공군의 탱크 저격수였던 것으로 우리는 짐작했다. 국군 1사단 3개 연대가 포진했던 운산에서는 우리를 지원하기 위해 이미 미군의 탱크가 와 있던 상황이었다. 엔진 소리 등으로 미군 탱크가 와 있는 것으로 파악한 중공군이 탱크 저격병을 전면에 내세웠다가 나와 박씨에게 포로를 내준 것이다.”

김대일씨는 중공군 첫 포로를 잡은 공로로 이듬해에 을지무공훈장을 받았다. 수색대원 전체와 함께다. 김씨는 “수많은 사람이 피와 땀을 바치면서 이겨낸 전쟁이 6·25”라며 “이름 없이 사라져 간 많은 희생자를 가능하면 많이 소개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전쟁 중에 장교(갑종 9기)가 됐다. 원주 235 수송대대에 근무하다가 69년 소령으로 예편했다.

유광종 기자, 사진=신인섭 기자

[6·25 전쟁 60년] 중공군 개입한 첫 전투 한국전쟁서 국제전으로

김대일씨 참전한 운산전투

중앙일보가 연재하는 백선엽 장군의 회고록을 보면 1950년 10월 말에 벌어진 운산전투는 ‘동아시아 국제전쟁’의 서막이었다. 당시 중공군 포로가 처음 잡힘으로써 중공군의 한국전쟁 개입이 확인됐기 때문이다. 국군 1사단을 이끌고 평안북도 운산에 진출한 백선엽 사단장은 일선에 나가 있던 15연대에서 붙잡은 중공군 포로를 통해 중국의 개입을 확인했다.

중국어를 할 줄 알았던 백 사단장은 포로를 직접 심문한 뒤 1사단을 지휘하고 있던 미 1군단의 프랭크 밀번 군단장에게 이 사실을 보고한다. 밀번 군단장도 현장에 도착해 중공군 포로를 심문했다. 밀번은 이 사실을 바로 도쿄(東京)에 있던 유엔군 총사령부의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에게 즉시 알렸다. 그러나 도쿄의 유엔군 사령부는 이를 과소평가한 것으로 전후의 각종 문서들은 증언하고 있다.

맥아더 장군은 운산전투에서 중공군의 개입으로 미 1기병사단의 8연대 병력이 크게 손상되는 것을 보고서도 11월 이른바 ‘크리스마스 공세’를 밀어붙였다. 운산 남쪽의 평안남도 개천군 군우리에서 미 2사단이 대패했고, 그 동쪽에 있던 국군 2군단의 7사단과 8사단도 큰 타격을 입었다.

동부전선에 진출했던 미 1해병사단 등도 후퇴를 거듭했다. 처음부터 한반도에 진주한 중공군의 병력 규모와 화력(火力) 등을 얕잡아 봤기 때문이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한국전쟁은 50년 10월 말 이후 사뭇 다른 양상으로 전개됐다. 국군과 미군을 포함한 연합군이 북한의 인민군과 중공군에 맞서 싸우는 본격적인 동아시아 국제전의 모습으로 양상이 바뀌었다. 중공군 첫 포로가 어떤 상황에서 잡혔는지에 대한 증언은 그래서 중요하다.

유광종 기자

[6·25 전쟁 60년]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⑫ 인디언 태형(笞刑)


1950년 11월 30일 평안북도 군우리에서 미 2사단이 중공군의 공격을 받고 거의 궤멸된 모습. [백선엽 장군 제공]

‘죽음의 협곡’ 벗어나니 한 중대는 170명 중 10명만 살아


인디언이 적군을 잡았을 때 가하는 형벌이 있다. 먼저, 전사(戰士)들이 두 줄로 길게 늘어선다. 그 다음 적군 포로를 그 사이로 지나가게 하고는 두 줄로 늘어선 전사들이 그를 사정없이 두들겨 패는 형벌이다. 이를 ‘인디언 태형(gauntlet)’이라고 부른다.

1950년 11월 30일, 평안남도 개천군 군우리 남쪽의 길고도 좁은 계곡에 빠졌던 미군이 중공군에 당한 게 바로 이 인디언 태형을 연상케 한다. 미군은 빠져나가기에는 너무 힘들 정도로 깊은 늪 속에 빠졌다. 이곳에서 미 2사단은 2개 연대와 포병부대, 사단직할부대, 공병대대 등의 전력을 상실했다.

지금도 많은 미군이 그때의 참패를 뚜렷이 기억하고 있다. ‘아비규환(阿鼻叫喚)’ ‘생지옥’이라는 상투적 단어로는 그 참상을 다 적기에 부족하다. 당시의 처절함은 데이비드 핼버스탬이 지은 『콜디스트 윈터(THE COLDEST WINTER)』(살림출판사, 정윤미·이은진 옮김)에 자세히 기록돼 있다. 책은 그날의 참상을 이렇게 적고 있다.

“차량 한 대가…당하면 그대로 길을 막는 걸림돌이 되었고, 몇몇 용감한 군인들이 나서서 차량을 길 밖으로 밀어내려고 하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중공군이 전면 공격을 가했다. 길 중간에는 부상당하거나 죽은 사람들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지만 뒤에 따라오는 트럭이나 지프는 길이 좁아서 그들을 그대로 짓밟고 가야 했다….”

“생사를 오가는 순간에 직면하자 다들 다른 사람의 안위에 대해서는 무감각해져서 전우들의 시체를 아무렇지 않게 넘어다녔다. 주변에 널브러진 사람들이 죽은 것인지 부상을 입은 것인지, 아니면 단지 공포에 질려 얼어붙은 것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몸은 움직이고 있지만 다들 충격으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사단장) 카이저는 직접 죽음의 고개를 정찰하려고 걸어가다 길가에 누워 있던 2사단 병사를 밟았다. 몸이 피곤해서 발걸음을 아무렇게나 옮기다가 실수로 밟은 것이었다. 밟힌 사람이 목청을 높여 “이런 나쁜 자식!”이라며 욕설을 퍼부었다. 깜짝 놀란 카이저는 자신도 모르게 “미안하네”라고 말했다. 그 일은 그곳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단편에 불과했다. 사방에 총에 맞은 시신이 널려 있었다….”

“(탱크 정찰팀의 샘 메이스 소위가) 탱크를 몰아 아주 가파른 커브를 도는 순간 거의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약 4㎞ 앞에 ‘죽음의 고개’라 부르는 길이 모습을 드러냈다…길을 뚫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그때 호송대가 아주 느린 속도로 길을 뚫고 오는 모습이 보였다…간신히 살아서 그곳을 빠져나오는 몇몇 미군들마저 이미 큰 충격을 받고 제정신이 아니었다. 메이스의 눈에는 죽은 사람이 저벅저벅 걸어오는 것처럼 보였다.”

결과는 처참했다. 이들 2사단 병력 중 살아남은 사람들은 나중에 서울 영등포에 재집결했다. 한 중대의 경우 170명 중 10명만 모습을 나타냈다. 한 대대는 600명의 대대원 중 150명만 살아 돌아온 것으로 책은 기록하고 있다. 미 2사단은 군우리에서 3000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막대한 무기와 장비를 잃었다.

나는 육군 참모총장을 두 차례 지냈다. 두 번째 임기 때였던 1958년 한국 군사력 강화를 위해 방미했을 때다. 한국전에서 미군 장성으로는 유일하게 포로로 붙잡혔던 윌리엄 딘 당시 24사단장(소장)으로부터 연락이 와서 샌프란시스코의 육군 장교회관에서 만났다. 군우리 전투에서 미 2사단을 이끌었던 로런스 카이저(1950년 4~12월 2사단장 재임) 당시 소장도 동석해 함께 식사를 했다.

딘 소장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그는 “포로로 잡혔을 때 사실 당신 신세를 진 일이 있다”고 말했다. 포로 수용소에서 인민군 장교 한 사람이 “백선엽씨를 아느냐”고 묻기에 “잘 안다”고 대답하자 감시병 몰래 모포와 음식 등을 갖다 줬다는 얘기였다. 그 인민군 장교는 내가 국군 창군 초기 부산의 5연대에서 근무할 때 부하로 데리고 있던 안흥만이라는 사람으로, 월북해서 인민군이 됐다. 우리는 웃으면서 여러 얘기를 나눴다. 6·25전쟁 전 그가 미 군정장관을 지낼 때의 이야기 등 화제가 다양했다.

그러나 카이저 소장은 시종일관 입을 굳게 다물고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얼굴에는 짙은 음영만 드리워져 있었다. 1950년 11월 군우리에서 당한 처참한 패배가 그의 뇌리에서 줄곧 떠나지 않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는 분위기가 너무 무거웠다. 나도 한마디를 제대로 꺼내지 못했다. 그냥 떠오르는 몇 마디 인사말로 그의 상처를 위로하기에는 당시의 참혹함이 너무 컸기 때문이었다. 카이저 소장의 얼굴을 지켜보면서 내 생각도 복잡해졌다. 전쟁은 얼마나 많은 목숨을 앗아간 것인가. 그 상처는 얼마나 깊고 두려운 것인가.

백선엽 장군

[6·25 전쟁 60년] 운산 전투-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⑪ 병사가 많았던 옛 땅 군우리


중공군들이 1950년 11월 30일 평북 개천 군우리 남쪽의 계곡에서 퇴각하는 미 2사단 병력을 공격하기 위해 이동하고 있다. 미군들이 나중에 ‘시련의 길’로 불렀던 이 지역에서 미 2사단은 2개 연대와 공병대대 등 전체 병력의 3분의 2가 궤멸하는 타격을 입었다. [백선엽 장군 제공]





미 2사단, 10㎞ 길고 긴 협곡으로 퇴각 … 비극은 시작됐다





중공군은 전력이 약한 상대를 집중적으로 공격해 왔다. 화력이 우세한 미군을 피해 전쟁 내내 국군을 집중 공격했다. 국군이 여러 면에서 미군에 뒤진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2차 대공세를 펴는 중공군의 노림수는 우선 동쪽 전선에 있었다. 국군 2군단이다. 2군단은 운산 전투가 벌어질 무렵에 큰 피해를 봤다. 압록강 물을 뜨러 올라간 2개 연대가 고립되면서 궤멸 상태에 빠져 결국 국군 6사단이 전투력을 상실하는 위기를 낳았다. 국군 7사단과 8사단도 인원과 장비 무기 등을 제대로 보급받지 못하면서 전력이 약해진 상태였다.



중공군은 이 점을 노렸다. 동쪽의 방어벽이 쉽게 무너지면서 그 서쪽에 있던 미군의 형세가 매우 위험해졌다. 그곳에서 드디어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운산(雲山) 이북은 험준한 적유령산맥이 동에서 서쪽으로 지나간다. 이 산맥은 순우리말로 ‘되너미 고개’로, 중국 쪽에서 쳐들어온 적이 이곳을 넘어 남녘으로 내려간다는 뜻에서 지어진 게 분명하다. 그 아래쪽에는 군우리(軍隅里)라는 곳이 있다. 지금은 개천이라는 곳에 속해 있는 작은 땅이다. 이 땅 이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군’은 병력을 뜻하는 말이다. ‘우리’라는 한자 지명의 우리말 원전은 ‘모루’다. 모퉁이를 뜻하는 말이다. 소나무가 무성하게 자란 곳을 일컬을 때 ‘솔모루’라고 부르는 것과 관련이 있다. 군우리는 즉, 군모루다. 과거 조선 때 늘 병력이 주둔하던 곳이라는 얘기다. 지명 관련 책을 나중에 찾아 봤다. 역시 그런 해석이 붙어 있었다.



되너미 고개에서 넘어오는 적들을 방어하기 위해 항상 병력이 머물렀던 곳이 군모루, 즉 당시의 군우리다. 군우리는 그 남쪽으로 긴 협곡 형태의 길이 나 있다. 이 길을 지나면 순천이라는 곳으로 직접 통한다. 순천은 평양과 인접한 곳이다. 군우리를 제대로 방어하지 못한다면 북으로부터 쳐내려온 적군들은 순천으로 나가 평양까지 단숨에 치달을 수 있다. 이를테면 군우리는 군사적인 요충이었다.







잘못된 판단이 거듭 이어졌던 모양이다. 이곳에 진출해 ‘크리스마스 대공세’에 나섰던 미 9군단의 사령탑 안에서 말이다. 역시 그들은 적유령을 넘어온 중공군에 대해 방심했던 흔적이 역력하다. 이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인 군우리에 진출하면서 미군은 그 지형적 조건이 초래할 엄청난 비극을 조금이라도 생각하지 않았던 게 분명하다.



크리스마스 대공세에 나선 이 지역의 미군은 2사단과 25사단이었다. 미 25사단은 강력한 중공군의 반격에 직면해 신속하게 후퇴한다. 그러나 미 2사단이 문제였다. 생각보다 강한 중공군의 공세를 보고서는 당황한 채 촌각을 다투는 상황에서도 아무런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군우리에서 미 2사단이 후퇴하는 길은 두 갈래다. 서쪽으로 우회한 뒤 남하하는 길과 군우리 남방에서 몇 ㎞ 떨어져 있으면서 길이는 10여 ㎞ 정도 되는, 산과 산 사이로 난 길을 지나는 두 가지 방법이었다. 미 2사단은 우회하는 길을 확보할 수 없었다. 그 길에는 이미 북으로 올라갔다가 남으로 퇴각하는 미군 등 연합군 부대와 피란민 행렬이 가득 차 있었다. 시간을 허비하지 않으려면 남쪽으로 난 계곡을 지나야 했다.



그 계곡은 두 가지 군사적인 의미를 지녔을 게다. 우선은 남북으로 직접 통하는 지름길이다. 다른 하나는 누군가가 이곳을 먼저 점령할 경우 공격적인 우세를 쉽게 확보할 수 있다는 점이다. 미군의 지휘부는 이 점을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듯하다. 그 계곡을 지나 북상하면서 최소한 작전상의 포석(布石)이 필요했을 것이다. 군데군데 병력을 남겨 계곡 위쪽을 지키면서 퇴로를 확보하는 개념의 작전이다. 미군은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 퇴로를 미리 확보하는 상상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이 점이 군우리에서 미군이 한국전쟁을 통틀어 최악의 참패를 맞이하게 된 직접적인 이유의 하나다.



그 좁고도 험하며, 또 매우 길었던 좁은 계곡에서는 우회와 매복, 그리고 포위 공격에 능한 중공군이 밤안개처럼 들어차고 있었다. 전후에 미군들은 이 길을 ‘시련의 길’로 불렀다. 짧지만 희생이 컸던 곳에는 ‘죽음의 고개’란 별명을 붙였다.



1950년 11월 30일. 사단의 후미에서 따라오던 프리만 대령의 23연대를 제외한 미 2사단의 대부분 병력이 군우리에서 남쪽으로 철수하면서 이 길에 들어서고 있었다. 중공군은 먹이를 노리는 맹수의 눈길로 침착하게 제 앞에 다가서는 제물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이 쳐놓은 덫은 강하고도 모질었다.



백선엽 장군

[6·25 전쟁 60년]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⑩ 11월 말 공격 그리고 후퇴, 후퇴


국군 1사단이 1950년 10월 평양으로 진격할 당시 백선엽 사단장(가운데)이 미 공군연락장교로 와 있던 윌리엄 메듀스 대위(오른쪽)와 작전을 논의하고 있다. 박천에서 중공군의 저격을 당했던 메듀스 대위는 후일 미 공군참모차장(대장)에 올랐다. [백선엽 장군 제공]










“밀리면 끝” 단내 나도록 독려 … 뚫릴 뻔한 전선 사흘간 버텨







갑자기 총탄이 스쳐 지나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그 직후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옆에 있던 미군 공군연락장교 윌리엄 메듀스 대위가 가슴을 부여안더니 쓰러졌다. 1950년 11월 하순의 일이다.



평안남도 입석에서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전력까지 보충했던 국군1사단 병력을 이끌고 청천강을 건너 평안북도 남부의 박천을 지나 태천을 향해 다시 북진하던 중이었다. 박천과 태천 사이에 우리 사단의 2개 연대가 올라가 있었고 나는 그 인근의 작은 구릉에 만든 전방지휘소에서 전선 병력을 지휘하던 중이었다. 갑자기 날아온 총탄에 메듀스 대위가 쓰러지자 나는 얼른 내 지프를 불러 그를 후송토록 했다. 피투성이가 된 그는 평양의 미군 병원으로 급히 옮겨졌다. 흉부 관통상이었으나 다행히 목숨을 건졌다. 그는 나중에 미 공군 대장까지 올랐다.



입석에서 태천을 향해 다시 진군을 시작한 것은 11월 24일이다. 총공격 명령이 내려졌다. 미 1군단은 여전히 한반도 서북부 지역을 담당했다. 담당지역에 변화가 있었다. 미 1군단 동쪽인 영변과 개천에서는 남쪽에서 올라온 미 9군단 휘하의 2사단과 25사단이 공격을 담당했다. 그 동쪽인 덕천과 영원에서는 국군 2군단이 작전을 맡았다.



국군1사단이 태천을 향해 진군할 때에는 적의 저항이 거의 없었다. 이 상태로라면 공격 최종 목표지점인 수풍까지 가는 데 별 어려움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방심은 금물이었다. 박천을 지나는 도중 매복해 있던 중공군이 내가 있던 쪽을 향해 사격을 가한 것이다.



중공군의 공격은 이튿날 불을 뿜었다. 전면적으로 치고 내려오는 대규모 공세였다. 전방이 다급해졌다. 전선을 담당한 2개 연대가 조금씩 밀리는 기색을 보이더니 점차 무너져가는 양상까지 드러냈다. 작전 중 지휘관이 반드시 피해야 할 게 있다. 분산(分散)이다. 부대가 흩어져 전력을 집중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는 것이다. 일단 분산되기 시작한 부대는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진다. ‘일사천리(一瀉千里)’라는 말이 있다. 한 번 물꼬를 넘어 흐르기 시작한 물이 거센 흐름을 형성하며 둑을 무너뜨리고 천리까지 그 기세를 한꺼번에 확장하는 것과 같다. 1사단의 상황이 거센 물길 앞에 선 작은 모래 더미처럼 보였다.







마음이 급해졌다. 구릉과 구릉 사이로 연대와 대대 등이 작전을 펼치고 있는 지점에서 1사단 병력 일부가 다급히 후퇴를 하는 장면이 내 눈에 들어왔다. 분산의 뚜렷한 징조였다. 나는 뛰었다. 구릉이라서 지프를 몰 수도 없는 지형이었다. 당시 상황이 하도 다급해 지금은 어느 연대가 앞에 섰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나는 연대본부와 대대본부 등을 닥치는 대로 찾아다니면서 지휘관들을 다그쳤다. “당신들 이러면 못 써.” “이러면 우린 끝이야.” “야, 이 사람아 밀리면 안 돼.” “빨리 앞으로 나가!” 내 입에서 나왔던 말들이다. 정신없이 반나절을 뛰어다녔다. 입에서 단내가 났다. 숨을 헉헉거리면서 부대와 부대 사이를 오가며 독전을 했다.



다행히 뒤로 밀리는 상황이 멈췄다. 전선의 두 연대가 전열을 가다듬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입석에서 정비한 탄약과 무기를 사용해 적의 공세를 막아내기 시작했다. 후방에 포진한 윌리엄 헤닉의 미 10고사포단이 해주는 지원 사격도 충분히 몫을 했다. 이렇게 사흘인가를 버텼다.



11월 24일 취한 아군의 공격은 이른바 ‘크리스마스 대공세’의 일환이었다. 도쿄에서 한국전을 총지휘하는 유엔군 사령부는 이번 공세로 전쟁을 끝낼 수 있다는 판단을 했다. 연합군과 미군 모두 1950년의 크리스마스를 고향에 돌아가 맞을 수 있다는 믿음에 차 있었다. 그렇기에 미군과 연합군의 상황 대처는 곳곳에서 허점을 드러내고 있었다. 충분히 적전(敵前) 상황을 침착하게 헤아리기에는 마음이 너무 들떠 있었는지 모른다. 그런 방심은 참화(慘禍)로 이어진다. 우리 앞에 곧 닥칠 참담한 결과를 확인하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마음을 풀어헤쳐 상황을 그릇되게 판단하는 자에게 닥치는 운명은 매우 가혹했다.



국군1사단이 배속된 미 1군단의 상황은 괜찮았다. 1사단은 박천에서 후퇴해 영유란 곳에 도착해 엄호부대(covering force) 역할을 하고, 박천과 태천 사이의 전선은 미 24사단이 다시 침착하게 방어를 하면서 차츰 아래쪽으로 후퇴하는 전법을 구사했다. 지연과 후퇴를 번갈아 하는 식이었다. 미 1군단은 이 덕분에 전 병력을 거의 그대로 유지하면서 후퇴할 수 있었다. 문제는 1군단의 동쪽, 한 달 전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운산의 바로 남쪽에 있던 영변 교두보였다. 불길한 적막감이 감돌았던 그 운산의 남쪽에서는 벌써 피비린내가 풍기고 있었다.



백선엽 장군

[6·25 전쟁 60년] 운산 전투 -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⑨ 전장에서 만난 영웅


1950년 10월 평양에 처음 입성한 국군 1사단의 공을 기려 프랭크 밀번 미1군단장(오른쪽)이 평양의 한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백선엽 사단장에게 은성무공훈장을 걸어주고 있다. 백 사단장의 키는 1m75㎝ 남짓, 밀번 군단장이 5~6㎝ 정도 작아 보인다. [백선엽 장군 제공]

군사 스승 밀번, 작전까지 바꿔 ‘한국군 첫 평양 입성’ 도와

이 대목에서 미군의 한 지휘관을 이야기하고 싶다. 나는 6·25전쟁 기간 중 미군의 제2차 세계대전 영웅들을 수없이 만났다. 더글러스 맥아더, 월턴 워커, 매튜 리지웨이, 제임스 밴 플리트, 맥스웰 테일러 등이다. 당대 최고 엘리트인 그들과 전쟁을 함께 치르면서 나는 미군의 뛰어난 시스템과 노하우, 지략을 배웠다.

그 가운데 내 기억 속에 가장 강하게 자리 잡고 있는 사람은 프랭크 밀번(1892~1962) 소장(당시 계급)이다. 위에 열거한 이들만큼 유명하지는 않지만 밀번은 나의 군사적 스승이다. 적의 공격 앞에 궁지에 몰리다가 막 반격의 기회를 잡기 시작한 낙동강 전선에서 그를 처음 만났다. 국군 1사단이 미 1군단에 배속되면서 나는 낙동강에서는 물론, 운산에서 적의 공세를 막아내며 후퇴할 때도 그의 지휘를 받았다.



그는 웨스트포인트(미 육군사관학교) 1914년 졸업생이다. 미 대통령을 지낸 아이젠하워, 8군사령관을 역임한 밴 플리트 장군이 그의 웨스트포인트 1년 후배다. 밀번 군단장은 1m70㎝에 조금 못 미치는 단신이다. 미국인으로는 상당히 작다. 목은 짧고 얼굴은 둥그런 편이다.


그는 매우 겸손했다. 하지만 싸울 때는 무척 용감하게 나선다. 전공도 제2차 세계대전의 전장을 누빈 여느 미군 전쟁영웅에 뒤지지 않는다. 포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전쟁터를 이리저리 뛰어다닌다. 그의 별명은 ‘시림프(Shrimp·새우) 밀번’이다. 그는 웨스트포인트 재학 시절 아주 유명한 미식축구 공격수였다. 그가 미식축구 볼을 가슴에 안고 머리를 숙인 채 질주하는 장면이 새우를 연상케 했다고 해서 붙은 별명이다. 그렇게 달리는 모습이 사람들이 배를 잡고 웃을 정도로 재미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와 친한 사람들은 밀번을 아예 ‘시림프’라고 불렀다.


그의 인상은 시골 노인네에 가까웠다. 1950년 여름, 낙동강 전선에서 북한군에 대한 국군과 연합군의 총반격을 코앞에 두고 있을 때 대구의 한 과수원에서 그를 처음 만났을 때의 인상이다. 그는 당시 강아지를 데리고 놀고 있었다. 장군이라기보다는 촌부(村夫)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그는 모든 사항을 사전에 꼼꼼하게 점검했다. 이것저것 다 따져본 뒤 상대가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판단하면 그 뒤로는 전폭적인 신뢰를 보낸다. 부하를 함부로 질책하지 않았고, 부하들의 말을 귀담아 들을 줄 알았다.

그는 나에게 기적과 같은 승리였던 ‘평양 입성 제1호’의 명예를 안겨줬다. 애초 미 1기병사단과 미 24사단이 진격하기로 했던 작전계획을 변경까지 했다. 전쟁 통에 이미 완성했던 작전계획을 수정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그는 “대한민국 군대가 평양에 처음 입성하게 해달라”는 나의 간곡한 호소를 기꺼이 들어줬다.

원래의 작전계획에 나와 있는 국군 1사단의 공격로는 해주와 재령을 거쳐 진남포로 가는 것이었다. 평양은 없었다. 밀번 군단장이 미 24사단의 공격로인 경부축 우측로를 국군 1사단에 넘겨주도록 변경한 것이다. 국군 1사단이 밤낮을 걷고 달려 미 1기병사단보다 15분 앞서 평양에 먼저 도착한 얘기는 다음에 자세히 언급하겠다.

나는 그에게서 참는 것을 배웠다. 일선 사단을 최대한 지원하면서 부하의 건투를 침착하게, 그리고 끝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칭찬에 인색하지 않았다. 그는 이를 통해 부하의 창의성을 이끌어 낼 줄 알았던 사람이다. 그의 지휘 아래에서 부하들은 매우 적극적으로 전투를 수행했다. 그가 없었다면 운산 전투는 아군의 더 참혹한 패배로 끝났을지 모른다. 그는 일선에서 올라오는 정보에 귀를 기울였다. 중공군 공격력에 대해 신중하게 반응했다. 국군 1사단의 후퇴 건의를 그 어느 미국의 지휘관보다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전쟁은 일순간의 판단으로 승리와 패배로 갈린다. 운산에 진출한 아군이 실력을 가늠하기 어려운 중공군의 거센 공세에 놓였던 그 순간에 그는 부하에 대한 신뢰에 입각해 옳은 판단을 내렸다. 미 1군단은 큰 피해를 보지 않았다. 1·4후퇴 이후까지 계속 적군에 밀리기는 했지만 나중에 대반격의 기틀을 잡은 것은 운산 전투에서 군단 건제(建制)를 그대로 유지했기 때문이다.

그는 6·25전쟁이 채 끝나지 않은 51년 5월쯤 중장으로 승진했다가 그해 7월 미국으로 돌아가 예편했다. 그 뒤 고향에서 학생들에게 미식축구를 가르치며 여생을 보냈다. 그는 부지런했다. 학생들 앞에서도 분명 몸을 사리지 않고 뛰어다녔을 것이다. 잔뜩 웅크린 채 뛰는 그의 ‘새우형 질주’를 보면서 젊은 친구들은 행복한 웃음을 지었을 것이다. 나의 군사 스승, 밀번 장군의 명복을 다시 빈다.

백선엽 장군

월요일, 1월 11, 2010

[주간조선] [최초 공개] 박정희 정권 핵개발 책임자 오원철 전 수석, 30년 만에 입 열다




김대현 기자 ok21@chosun.com

입력 : 2010.01.12 13:23 / 수정 : 2010.01.12 16:32



▲ photo 이경호 조선영상미디어 기자




▲ 1972년 9월 8일 오원철 전 수석이 작성한 핵무기 개발 관련문서. 신군부 집권 후 원자력 기술개발 ‘올스톱’




▲ 우라늄 농축에 사용되는 ‘옐로 케이크(정제우라늄)’.




▲ 안보에 관심이 높았던 박정희 전 대통령(오른쪽에서 세 번째)은 방위 산업 현장을 수시로 시찰했다. / photo 조선일보 DB “핵무기 거의 완성 단계까지 갔다”


“核 봉투 2개 봉인해 최규하에 전달… 신군부가 美에 넘겼을 가능성”


한국전력이 총 건설비 200억달러에 달하는 아랍에미리트연합(UAE)의 원자력발전소 프로젝트를 수주하면서 원자력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정부가 원전 개발에 착수한 지 40여년 만에 프랑스 등 원전 선진국의 기술력을 따라잡은 것은 물론이고 세계에서 6번째 원전수출국이 되는 쾌거를 이뤘기 때문이다.

한국이 ‘원전 강국’으로 발돋움하게 된 출발점은 박정희 정권 시절에 마련됐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미국의 감시와 견제 속에 원전 기술 확보에 주력했다.

미국은 박정희 정권이 원전 기술을 확보해 핵무기를 개발하려 하는 게 아니냐는 의구심을 떨쳐버리지 못했다. 아직 많은 부분이 베일에 가려 있지만 실제 박정희 정권이 핵무기 개발에 착수했다는 것이 당시 관계자들의 증언과 관련 문서를 통해 드러난 바 있다.

한국의 핵무기 개발 노력은 박 전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함께 중단됐다. 핵무기뿐 아니라 원전 개발 노력도 중단됐다. 한국이 다시 원전 개발에 뛰어든 것은 이후 10여년이 지난 노태우 정권 때였다.

‘원전 강국’ 한국의 초기 원전 개발사에는 상당한 우여곡절과 비밀스러운 사연들이 담겨있다. 박정희 정권 당시의 핵무기 개발이 실제 어느 정도까지 이뤄졌는지, 관련 성과물과 기록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가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박정희 정권 당시 원전 개발의 총괄 책임자는 오원철 전 청와대 제2경제수석이다. 오 전 수석이 당시 핵무기 개발 비사(秘史)에 대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는 주간조선과의 수차례 인터뷰에서 “우리는 당시 핵무기 기술과 관련해서 일본 정도의 기술력을 확보하라는 (박 대통령의) 지시를 받고 임무를 수행했다”며 “그러나 국가기록원에 있어야 할 핵무기 관련 문서는 (박 대통령 서거 이후) 사라져 버렸다”고 주장했다.

오 전 수석과의 인터뷰 내용을 토대로 원전 초기 개발사와 핵무기 개발에 관련된 숨겨진 이야기들을 정리했다.


1972년 초 “핵무기 기술력 확보하라” 주문

박정희 전 대통령이 처음으로 핵무기와 관련된 구상을 한 것은 1970년 중반 무렵이었다. 미군 철수 문제가 최대 현안으로 부상하자 안보 차원의 대안을 모색하다 ‘결단’을 내렸다.

박 전 대통령은 1972년 초 김정렴 비서실장과 오원철 경제수석을 집무실로 부른 뒤 “평화를 지키기 위해 핵무기가 필요하다. 기술을 확보하라”고 주문했다. 당시 국내에서도 중수로형 원자로 건설이 가능한 수준의 기술력은 확보된 상태였다.

총괄 책임은 오원철 전 수석이 맡았다. 방위산업 분야 총괄 책임자였던 그는 박 전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등 기존 연구기관을 동원해 핵무기 개발 기술력을 확보하기 위한 극비 프로젝트를 가동했다. 국방과학연구소 등 전문 인력을 갖춘 7개 연구기관에 각각의 연구과제를 지시했다.

당시 연구진은 국내에서 우라늄 조달이 가능한지, 플루토늄 재처리 설비를 갖출 수 있는지도 검토해 기초 자료를 만들었다.

국방과학연구소를 비롯한 여러 연구 기관에 과제를 분산해 맡긴 것은 미국의 감시와 견제에서 벗어나기 위한 고육책이었다. 당시 미국은 ‘한국이 핵무기를 만들려고 한다’는 강한 의구심을 품고 ‘정보원’을 동원해 청와대와 유관 연구시설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청와대의 가장 큰 고민은 보안 문제였다. 국방과학연구소에 연구를 통째로 맡길 경우 다수의 연구원들이 핵무기 개발을 인지하게 되고 결국 보안을 유지할 수 없을 것으로 판단했다.

그래서 청와대가 지시한 연구 과제가 핵무기 개발을 위한 용역이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도록 여러 곳으로 분산해 진행했다. 7개 프로젝트를 하나로 연결하는 청와대의 컨트롤 타워에서만 종합적인 판단이 가능하게끔 운영했다.

오 전 수석은 “미국은 1975년 우리가 핵연료 재처리시설을 확보하기 위해 프랑스와 교섭을 벌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국내로 들여오는 국방 관련 기자재를 일일이 검색했다.

하지만 여러 파트로 쪼개서 진행되는 연구개발 방식으로 인해 미국이 핵무기 개발의 확실한 물증을 잡아내는 데는 실패했다”고 말했다.

핵무기 관련 연구 과제가 진행되는 동안 각 연구소에서 올라오는 보고서는 모두 박 전 대통령에게 전달됐다. 보고서는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됐는데 기술진들이 직접 올린 기술적 보고서와 오 전 수석이 작성한 추진 계획 및 진행 상황에 대한 보고서였다.

1972년 9월 8일 오 전 수석이 작성한 보고서 중 일부는 국가기록원의 정보공개를 통해 일반에 공개된 바 있다.

2급 비밀문서로 분류된 이 문건에는 ‘핵무기의 종류 및 우리의 개발 방향’ ‘우라늄 탄두와 플루토늄 탄두에 대한 장·단점 비교’ 등 개괄적 내용과 함께 ‘우리나라의 기술 수준으로 보아 플루토늄탄을 개발한다’는 잠정적 결론이 담겨있다.

이 문건은 박정희 정권 당시 핵무기 개발이 추진됐던 결정적인 근거 자료 중 하나다. 그러나 연구 실무진들이 작성한 보고서는 현재 국가기록원에서도 찾을 수 없다. 보고서에는 핵무기 개발의 기술 관련 내용이 담겨있다.

이들 보고서는 일종의 ‘실종’ 상태라는 것이 오 전 수석의 주장이다. 박 대통령 서거 이후 청와대의 대통령 개인금고에 보관 중이던 핵심자료들이 어디론가 유출됐다는 것이다. 오 전 수석은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박 대통령 서거 직후 수석비서관들이 청와대에 모였다. 대통령의 서재 뒤편에 있던 풍금 크기만한 금고를 열었다.

거기에는 여성 월간지 크기의 노란 봉투 2개가 들어 있었는데, 핵무기 관련 보안 문서가 담긴 봉투였다. 문서가 더 있었을 수도 있다. 어쨌든 담당자였던 나는 해당 문서를 봉인해서 최규하 대통령에게 넘겼다.

이 문서들은 나중에 신군부에 전달됐다고 들었다. 내가 작성했던 핵무기 관련 일부 문서가 보통 문서로 분류돼 (국가기록원을 통해) 일반에 공개된 것을 알고 다른 핵무기 관련 문서들을 영구 비밀문서로 바꾸기 위해 국가기록원에 갔을 때는 노란 봉투 속에 담겨 있던 문서들이 보이질 않았다. 외부로 유출된 것 같다. 그게 미심쩍은 대목이다.”

오 전 수석은 “당시 핵 관련 문서는 미국으로 넘어갔을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도 폈다. 박 전 대통령은 자신의 금고에 항상 일정 금액 이상의 현찰과 함께 핵 문서를 보관해 왔는데 박 대통령 서거 후 수석비서관들이 금고를 열었을 때는 금고 안에 단 한 장의 지폐도 남아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 전 수석은 “노란 봉투 속 문서 외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질 않았다는 점에서 다른 누군가가 먼저 손을 댔다는 의구심을 품었지만 더 이상 금고에 대해서는 재론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우라늄 농축용 ‘옐로 케이크’ 박 대통령에 전달"

당시 핵무기 개발 프로젝트는 완성단계까지 진행됐다. 박 전 대통령은 10·26 사건이 발생하기 직전 우라늄농축용 분말로 노란색인 ‘옐로 케이크(yellow cake·정제우라늄)’를 선물받았다고 한다.

당시 정부는 핵연료 재처리를 금지한 미국과의 원자력 협정에도 불구하고 플루토늄 재처리 기술 개발도 이어갔다. 박 대통령이 서거하기 전 우리 기술진은 우라늄이든, 플루토늄이든 핵연료를 100% 확보할 수 있는 기술력을 가지고 있었다.

오 전 수석은 “KIST 출신의 한 인사가 노무현 정부 시절 과거 우리 기술로 만든 ‘옐로 케이크’를 보관하고 있다가 미국에 들켜 큰 변을 치른 적이 있었다”며 “당시 정부가 떳떳하게 대응하기는커녕 그걸 (미국에) 설명하느라고 쩔쩔매 한심하게 느껴졌다”고 지적했다.

핵무기 기술 개발이 정점으로 치닫고 있던 1970년대 말 박 전 대통령은 핵을 무기화 하느냐 마느냐에 대한 마지막 결정을 내리기 위해 김정렴 비서실장, 오원철 경제수석, 서종철 국방장관, 국방과학원(ADD) 책임자 등 4명을 집무실로 불러들였다. 당시 상황에 대한 오 전 수석의 설명이다.

“이날 (핵무기 관련) 결정은 아주 중요한 내용이었다. 핵에 대한 박 대통령의 의지가 담겼고 거기서 나눈 대화와 결정사항은 문서로 남겼는데 이 문서도 사라진 노란 봉투 속에 들어 있었다. (당시 대화) 내용은 기자분이 아무리 물어봐도 공개할 수는 없다. 다만 아주 긍정적인 내용이었다는 점만 알아 달라.” ‘긍정적인 내용’에 대해 오 전 수석은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았다.

오 전 수석은 “박 대통령은 북한과 달리 평화를 지키기 위한 핵 이용을 줄곧 강조해 온 분”이라며 “핵무기만을 고집하는 지금의 북한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접근이었다. 박 대통령은 그런 의미를 강조하듯 상징적 차원에서도 핵무기 관련 문서에 일절 서명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원자력 기술 국산화 놓고도 미국과 신경전


오 전 수석은 이명박 정부가 나서 성사된 UAE 원전 수주와 관련 “이번 원전 수출은 박정희 대통령이 토대를 잡아 놓은 원전 기술이 진정한 ‘무궁화 꽃’을 피운 결과”라고 말했다.

오 전 수석에 따르면 박정희 정권이 원전 기술을 확보하는 과정도 순탄치 않았다.

국내 원자력 역사는 이승만 대통령 당시인 1956년 2월 한·미 간 체결된 ‘원자력 비군사적 이용에 관한 쌍무협정’에서 출발한다. 이후 한국은 1957년 8월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가입했고 1958년 3월에는 원자력법을 공표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원자력에 대한 강한 의지를 갖고 있었고 이러한 의지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이어졌다. 박정희 정권은 1962년 3월 차관 도입을 통해 마련한 재원으로 국내 최초의 연구용 원자로를 확보했다. 그러나 이때부터 원전 개발과 관련된 미국과의 외교적 마찰은 수시로 발생했고 갈수록 농도도 짙어졌다.

1970년대는 국제사회에서 핵무기 등 대형 살상무기를 제어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던 시기다. 1975년 인도에서 핵실험 성공 사실을 공표하자 미·소 열강의 핵무기 개발 확산을 막기 위한 압박은 한층 강화됐다. 당시 한국도 북한과 대치하는 상황에서 핵무기 개발 유혹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고 이를 간파한 미국은 한국 원자력 기술개발 전 과정을 철저히 통제했다.

미국의 견제 속에서도 한국은 1970년 6월 국내 최초의 원자력발전소인 ‘고리1호기’ 계약을 미국과 성사시켰고 1972년에는 프랑스와 플루토늄 재처리기술 및 시설도입에 관한 교섭도 추진했다.

하지만 미국은 한국의 재처리 시설 도입은 반대했다. 미국은 유사 시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는 서전트(Sergeant) 미사일부대를 철수시키겠다며 압박을 가했다. 미국은 한국이 캐나다로부터 농축우라늄을 활용하는 원자로 수입을 추진할 때도 캐나다에 압력을 가해 무산시켰고, 고리 2호기 건설을 위한 차관 도입 승인조차 보류했다. 결국 박정희 정부는 1975년 핵확산금지조약(NPT)에 서명, 인준함으로써 미국의 압력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었다.

원자로 개발을 둘러싼 대미 외교전은 1979년 지미 카터 대통령의 방한 때 절정으로 치달았다. 오 전 수석은 “경남 창원에 건설되는 대규모 원자로 생산 시설에 대해 미국이 강한 의구심을 품었고 카터 대통령까지 직접 현장을 방문하려 했었다”고 말했다.

카터 대통령의 창원 방문은 현실화되지 않았지만 수십 명의 백악관 의전비서관이 카터 방한에 앞서 창원 현지를 찾았다고 한다. 오 전 수석은 “카터는 박 대통령을 만나고 난 후 야당 총재를 만났다. 당시 우리 정치 상황에서 미국 대통령이 야당 총재를 만난다는 것은 ‘나는 박정희 정권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의사를 표시한 것과 같다”고 말했다.

공교롭게도 카터의 방한 4개월 뒤 박 대통령은 핵심 측근인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알에 사망했다.

하지만 박 전 대통령은 미국의 견제와 감시 속에서도 원자력 개발과 관련된 적지 않은 성과를 남겼다. 미국의 반대로 중도 폐기된 재처리시설을 제외하고 고리 1·2호기, 월성 1·2호기, 핵연료봉 공장 등의 원전시설은 모두 착공됐다. 원자로와 원자력 발전기기의 국산화 계획을 위한 연구소도 활성화됐고 창원기계공업기지 내에 원자로 가공공장도 건설됐다.

박 전 대통령 서거 이후 신군부가 집권하면서 국내 원자력 분야 기술개발은 사실상 중단됐다. 오 전 수석은 그 배경에 대해 “신군부가 정권 창출의 명분을 얻기 위해 미국의 눈치를 보며 각종 요구를 수용한 탓”이라고 분석했다.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고 나서 원자력이라는 명칭조차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 원자력연구소를 에너지연구소로 바꾸고 한국핵연료㈜도 나중에 한국원전연료로 변경했다. 국방산업의 핵심이던 ADD 소속 연구원은 800명(당시 ADD 연구원은 총 1000명 규모)이나 잘랐다. (미국과) 뭔가 딜(Deal)이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신군부가 집권한 시기에 원자력 산업은 최소한의 동력마저 상실했다. 핵 관련 주요 문서는 사라졌고 당시 연구자들과 기획자는 대부분 일자리를 잃었다. 박정희 정부 때 청와대 핵심 인사들은 철저하게 격리됐고 보안당국의 감시 속에서 10년 이상의 세월을 보냈다.

당시 핵 관련 일부 담당자에 대해서는 ‘포살해야 한다’는 의견이 국무회의 석상에서 나왔을 정도였다. 원전 건설의 핵심 부품공장이던 창원 소재 현대양행㈜도 정권과 여론의 비판에 밀려 사실상 공중 분해됐다.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의 동생이 일군 현대양행은 전두환 정권 시절 현대가의 손에서 떠났고 이후 한국중공업을 거쳐 지금은 두산중공업으로 탈바꿈해 있다.

이후 ‘원자력’이라는 단어가 다시 부활하기까지는 13년의 세월이 걸렸다. 노태우 정권은 경제 규모가 커지면서 국내 에너지 수요가 급증하자 다시 원자력 발전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하지만 순수 에너지 확보 차원의 접근이었을 뿐 ‘핵주권’과는 거리가 있었다.

특히 핵무기에 대해서는 이후 어느 정권에서도 언급되지 않았다. 일본이 플루토늄 재처리시설을 확보하고 기술개발에 나선 것과 달리 우리는 관련 시설을 도입하지 못한 채 30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와 관련 오 전 수석은 “원전수출국 반열에 오른 것을 계기로 우리도 ‘핵주권’을 확보할 때가 됐다”는 주장을 폈다. 미국과의 원자력협정 시한이 오는 2014년 완료되면 우선 재처리시설을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다.

재처리시설이 없는 탓에 현재 국내 원자로에서 나온 핵연료 수만 톤은 고스란히 저장고에 보관돼 있다. 저장고를 만들고 유지하는 데 매년 막대한 예산을 투입해야 하는 게 우리 원자력산업의 가장 큰 골칫거리다. 쓰고 남은 핵연료는 재처리를 통해 재사용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전문가들도 재처리시설 도입의 필요성에 입을 모으고 있다.
[6·25 전쟁 60년] 운산 전투 -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⑧ 달콤한 휴식




운산 전투 며칠 뒤인 1950년 11월 초 연예인 위문단이 평양 북쪽의 평안남도 안주군 입석에 주둔했던 국군 1사단을 찾아 공연을 하고 있다. [백선엽 장군 제공]


서울서 온 연예인 공연단, 중공군과 격전 치른 장병들 위로

우리는 미군의 희생을 뒤로하고 평안북도 운산에서 청천강 남쪽으로 내려왔다. 평양 북쪽의 평안남도 안주군 입석(立石: 영변 주변의 입석과는 다른 지역)이라는 곳에 도착해 재정비를 했다. 청천강 남쪽에는 반격을 위한 교두보가 만들어졌다. 청천강을 자연적인 방어선으로 설정한 것이다. 그곳에는 청천강을 건너 서북쪽인 신의주 방향으로 진격하다가 별다른 피해 없이 후퇴해 내려온 미 24사단, 평북 구성 방향으로 진출하다 역시 무사히 퇴각한 영국군 27여단이 방어막을 형성했다.

중공군의 1차 공세를 무사히 겪어내고 남쪽으로 내려오던 길은 여러 가지 생각으로 마음이 착잡했다. 불안한 마음도 없지 않았다. 중공군 전력이 예상만큼 간단치 않았다는 점도 마음에 걸렸다. 더 많은 병력이 중국으로부터 한반도에 들어올 것이다. 과연 저들을 어떻게 막아내고 압록강까지 진출할 수 있을까. 만감이 교차하고 있었다.

내가 지휘하는 국군 1사단은 아주 의외의 대접을 받았다. 프랭크 밀번 미 1군단장이 우리 사단을 군단의 ‘예비’로 조정했다. 전력 재정비 차원이었다. 나름의 배려였다. 낙동강 전선에서 반격을 시작한 뒤 평양 입성, 운산 전투 등에서 쉼 없이 최전선을 담당했던 1사단에 모처럼의 휴식 시간이 주어진 것이다. 우리는 평양 북방 안주평야에 있는 입석의 비행장에 주둔했다. 우리 사단은 운산 전투에서 500여 명의 사상자, 중(中) 박격포 2문 상실 등의 피해를 보았다. 그 상처를 치료하고 전열을 가다듬으면서 앞으로의 반격을 위한 준비를 해야 했다.

비행장 크기는 상당했다. 여의도 비행장 규모는 돼 보였다. 미군 수송기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착륙했다. 전선으로 보내는 물자를 싣고서였다. 매일 뜨고 내리는 비행기를 바라보면서 안정적인 물자 보급의 중요성을 실감했다.

우리는 이때서야 동복(冬服)을 지급받았다. 탄약도 새로 챙길 수 있었다. 신병도 보충해야 했다. 모든 사안이 내가 직접 결재하고 처리해야 하는 일들이었다. 대한민국 육군본부, 미 1군단 사령부와 늘 의견을 주고받았다. 피복과 신병 재충전은 육군본부와 연락하면서 해결해야 했다. 탄약과 다른 보급품들에 관한 사항은 미군과의 연락을 통해 처리해야 했다. 병사들의 훈련도 다시 시켜야 했다. 오랜만에 맞이한 달콤한 휴식 시간을 즐기고자 했던 장병이지만 그래도 전열은 침착하게 다시 다듬는 게 바람직하다.

그래도 병사들은 즐거운 표정들이었다. 피비린내 나는 전장이 코앞에 있지만 이때의 휴식 시간을 나름대로 즐기고 있었다. 이곳 안주평야에는 일제시대 때 대규모 전답을 개발한, ‘신전(新田)’ 개척지가 있다. 너른 평야에 논이 발달해 있었다. 마침 추수가 끝나 들녘에는 볏짚단이 여기저기 수북이 쌓여 있었다. 병사들은 이 볏짚을 사용해 임시 움막을 짓고 있었다. 아담한 크기의 볏짚 움막 수백 개가 비행장 주변의 들판에 만들어져 있어 눈길을 끈 기억이 난다. 푹신한 볏짚을 깔고 달콤한 잠을 이루는 병사들을 지켜보며 평화의 소중함을 다시 떠올렸다.

전쟁 중에 보는 위문 공연은 특별하다. 이때 서울에서 연예인들로 이뤄진 공연단이 왔다. 임시 가설 무대에서 이들이 보여주는 춤과 노래는 전쟁에 지친 장병에게 특별한 위로를 주었음은 물론이다.

이틀인가, 사흘인가를 묵고 떠났던 연예인 공연단에는 코미디언 김희갑(1923~93)씨가 함께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원래 그 쪽에 관심이 별로 없었다. 이름을 제대로 알고 있는 연예인이 거의 없었다. 김희갑씨 정도는 알겠으나 다른 연예인들에 대한 기억은 그래서 없다. 참모 중의 한 사람이 “거, 왜 ‘홍도야 우지 마라’ 아시잖습니까. 그 가수도 와서 노래했습니다”라고 전해줬던 기억만이 있다.

나는 공연 첫날 대열 뒤쪽에서 선 채로 이들의 공연을 30분 남짓 지켜봤다. 병사들은 사단장인 내가 그들 속에 함께 섞여 있는 것도 모를 정도로 공연에 흠뻑 취해 있었다. 왁자지껄한 분위기 속에서 연예인들의 춤과 노래가 펼쳐졌고, 병사들은 환호했다. 병사들이 이렇게라도 위안을 얻을 수 있다는 점에 감사했다.

그러나 나는 챙길 게 많았다. 우리는 새로 나타난 전선의 적들에게 왜 밀렸는가. 후퇴는 잘한 것인가. 중공군의 전력은 어느 정도로 강한 것일까. 이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맴돌았다. 다시 군화 끈을 조여 매야 하는 상황이었다. 10여 일 동안의 휴식 기간 동안 나는 달콤함을 전혀 느낄 수 없을 만큼 바빴다. 전투력이 강하고 끈질기면서 교란과 우회작전을 능수능란하게 펴는 적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백선엽 장군

[전쟁사 돋보기] 육군연예대

[전쟁사 돋보기] 육군연예대

1950년 7월 대구서 창설
배우 황해씨 소대장 맡아


전쟁이 터지면 연예인들도 위문공연을 통해 군사활동에 참여한다. 심신이 지친 장병에게 연예인들의 춤과 노래는 큰 위안이 된다. 6·25전쟁이 발발한 다음 달인 1950년 7월 19일 유명 연예인들이 대구에 모여 육군연예대를 창설했다. 정일권 당시 참모총장(5대: 50년 6월 30일~51년 6월 22일 재임)이 후생감실에 지시를 내린 게 계기다. 연예인들의 군 위문공연은 49년 국군의 지리산 공비 토벌 작전 때부터 있었지만, 본격적인 활동은 육군연예대가 만들어지면서 시작됐다.

영화배우 황해씨가 소대장을 맡았다. 김희갑·김진규·신카나리아 등 당대의 유명 배우와 가수 등이 무대에 올라 국군과 연합군 장병을 위문했다. ‘홍도야 우지 마라’를 부른 가수 김영춘(1918~2006)씨도 참여했다. 수복된 평양에도 들어가 시민 위문공연을 펼쳤다. 위문공연은 1·4 후퇴를 전후해 피크를 이뤘다. 그 외에도 작가·보도요원·화가·음악가·영화인 등 각 분야 전문가들이 군대와 함께 이동하면서 많은 작품과 기록을 남겼다.

개전 초 서울이 북한군의 수중에 떨어졌을 때 연예인 일부가 ‘화랑 반공지하공작대’를 결성해 점령군에 저항했다는 기록이 있다. 지하공작대원 11명이 아군의 서울 탈환 직전에 발각돼 학살됐다고 전해진다.

김민석 군사전문기자

[6·25 전쟁 60년] 운산 전투 -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⑦ 드러난 중공군의 얼굴

[6·25 전쟁 60년] 운산 전투 -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⑦ 드러난 중공군의 얼굴






6·25전쟁에 개입한 중공군 13병단의 병사들이 1950년 10월 말쯤 평안북도 운산에서 국군 1사단을 공격하기 위해 이동하고 있다. ‘중공군 1차 공세’로 불리는 당시 공격으로 미군은 1개 대대 병력과 적잖은 무기를 잃었으나 국군 1사단은 비교적 온전하게 운산 지역을 빠져나왔다. [백선엽 장군 제공]





중공군, 생각없이 머릿수로 밀어붙이는 군대 아니었다


1950년 11월 초가 되면서 중공군의 1차 공세가 일단 주춤해졌다. 국군 1사단은 운산 남쪽의 입석(立石)이라는 곳으로 후퇴했다. 교전을 해보니 중공군의 실력을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게 됐다. 그들은 생각보다 강했다.

중국에서 생활해 본 경험이 있는 나는 중공군의 습성을 대강 알고 있었다. 그들은 매복과 기습에 강했다. 정면으로 밀고 들어오는 전법은 별로 구사하지 않는다. 철저하게 우회와 매복, 기습을 노린다. 중국 공산당 팔로군(八路軍)이 항일전의 최대 승리라고 자랑하는 핑싱관(平型關) 전투가 대표적이다. 팔로군 115사 병력 6000여 명이 1937년 9월 산시(山西)성 핑싱관의 길고 깊은 계곡 안에서 일본군 5사단 등의 1만 병력을 매복 공격한 전투다.

6·25전쟁에 참전한 중공군도 다를 게 없었다. 보이지 않는 곳에 자신을 숨긴 채 공격을 가해왔다. 우리의 공포심을 유발하기 위해 깊은 밤, 어둠 속에서 피리를 불면서 접근해왔다. 야간전투를 싫어하는 미군들은 특히 중공군의 피리 소리에 진절머리를 냈다. 국군도 초기에는 이 피리 소리에 당황하면서 사기가 꺾이는 경우가 잦았다.

압도적인 병력을 앞세워 거침없이 정면을 공격해 오는 ‘인해전술(人海戰術)’을 중공군의 특징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만 내가 실제 상대해본 그들은 그렇지 않았다. 일단 전투가 벌어지면 병력이 소진할 때까지 마구 밀어붙이는 그들의 전법을 ‘인해전술’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중공군은 야습·매복·포위·심리전 등 나름대로 체계와 노림수가 분명한 전술을 구사했다. 게다가 장제스(蔣介石) 국민당 정부가 대만으로 패주하면서 남기고 간 우수한 미국제 무기가 그들의 손에 들려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사람 수로만 밀어붙이는 그런 군대는 분명히 아니었다.

재미난 것은 일단 포로로 잡힌 중공군들의 인상과 태도는 야밤을 틈타 맹렬한 공격을 퍼붓던 그런 전사의 이미지와는 많이 달랐다는 점이다. 이상할 정도로 유순했다. 낙천적인 기질도 보였다.

국군 1사단 12연대장을 맡아 늘 격렬한 전투의 선봉에 섰던 김점곤 대령(예비역 소장)은 흥미로운 얘기를 하나 들려줬다. 김 대령이 운산 전투에서 잡은 중공군 포로의 1차 심문을 끝내고 좀 더 깊이 있는 ‘전략 심문’을 하기 위해 후송할 즈음이었다. 그 포로는 “다른 물건은 다 압수해도 좋은데, 비싼 만년필은 꼭 돌려줘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원래 포로의 물품은 모두 압수하는 게 원칙이지만 김 대령은 ‘도대체 얼마나 귀중한 만년필이기에 그러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 부하에게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문제의 만년필을 본 김 대령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잉크가 줄줄 새는 싸구려 만년필이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 중공군 포로는 간절하면서도 완강하게 이를 원했다. 결국 만년필을 돌려준 김 대령은 중공군의 약점 하나를 간파했다. 그것은 궁핍함이었다. 품질이 조악한 만년필과 이를 애지중지하는 포로의 자세에서 볼 때 전투력 유지의 핵심인 보급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음을 알아차린 것이다. 중공군이 초기에는 화력이 강했지만 결국엔 보급 문제로 전력을 유지하기 힘들 것이라는 관찰이었다.

유쾌한 포로도 있었다. 어느 전선에서 잡혔는지 기억이 불분명하지만 중공군 포로 한 명은 “내가 요리 하나는 잘한다.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서 주겠다”고 제의하는 여유를 보여 부대원들에게 웃음을 안겼다는 일화도 있다.

그래도 이들은 전투에 임하면 무서울 정도로 진격했다. 공산당의 강력한 규율이 그 뒤에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4열 종대로 서서 물 밀듯이 밀려오는 중공군은 분명히 경계의 대상이었다. 김점곤 대령의 표현을 빌리자면 피리와 꽹과리 소리를 울리면서 깊은 밤에 공격해 오는 중공군은 늘 ‘심야의 무당 집에서 풍겨나는 굿판의 분위기’를 풍겼다는 것이다. 그들은 항상 그런 식으로 섬뜩하게 다가왔다.

운산에서 한바탕 전투를 치렀음에도 미군은 중공군의 실력을 아직 얕잡아 보고 있었다. 미군은 ‘성탄절은 집에서 맞는다’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1950년 11월 말 대공세를 준비했다. 이는 누군가의 표현대로 ‘재난으로 향하는 눈 먼 행군’이 될 운명이었다.

백선엽 장군

금요일, 1월 08, 2010

[6·25 전쟁 60년] 운산 전투 -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⑥ 미 8기병연대 3대대

 [6·25 전쟁 60년] 운산 전투 -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⑥ 미 8기병연대 3대대



윌리엄 헤닉 대령이 지휘하는 미 10고사포단이 1950년 11월 1일 평북 운산의 중공군을 향해 포격을 가하고 있다. 10고사포단은 10월 31일 밤과 다음 날 새벽까지 1만3000발의 포탄을 퍼붓는 격렬한 포격으로 중공군의 공세를 꺾어 국군 1사단의 순조로운 철수를 도왔다.


밤새 포탄 1만3000발 엄호했지만 미군 600명 전사·행불


1950년 11월 1일 새벽 1시쯤이었다. 나는 길을 재촉했다. 영변의 국군 1사단 사령부를 향해 지프를 달렸다. 밤길을 달리는 지프 뒤로 스쳐가는 바람이 차가웠다. 불안감과 초조함이 스쳤다가 지나가는 바람처럼 끊임없이 내 얼굴로 불어닥치고 있었다. 운산으로 나가 있던 3개 연대의 철수는 순조로울까. 이들은 8기병 연대처럼 무지막지한 공격에 노출된 것은 아닐까. 이런저런 생각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운산 쪽에선 포성이 끊이지 않고 들려 왔다. 윌리엄 헤닉 미 10고사포단장의 고사포와 박격포들이 불을 뿜고 있는 소리였다. 다행이었다. 아군 포병이 지원 사격을 계속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셈이다. 정상적인 철수 작전이 헤닉의 포 사격 지원 아래 진행 중이라는 믿음이 자리를 잡아 가고 있었다.

헤닉은 나와의 약속대로 최대한의 포 사격으로 국군 1사단 운산 전선 병력의 철수를 지원하고 있었다. 그날 밤 사단 병력은 전면 철수했다. 일부 연대 병력이 다치기는 했지만 전체적인 편제를 그대로 유지한 채 후퇴할 수 있었다. 철수는 11월 1일 새벽까지 이어졌다. 헤닉은 보유한 1만5000발의 포탄 중 1만3000발을 소진했다. 헤닉이 짧은 시간 내에 엄청난 포격을 가하는 바람에 적은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그 틈을 타서 국군 1사단의 3개 연대 병력과 헤닉의 고사포단 병력도 무사히 후방으로 빠져나왔다.


그러나 국군 1사단 주둔지를 통과해 수풍댐으로 진격하라는 명령을 받은 미 1기병사단 8연대가 문제였다. 그 가운데 3대대의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국군 12연대장으로 전투 경험이 풍부하면서 기지와 용맹이 돋보였던 김점곤 대령으로부터 급한 연락이 왔다. “후퇴 길에 있는데, 미 8기병연대 3대대의 상황이 너무 급합니다. 구원을 요청해 왔는데 어떻게 하는 게 좋겠습니까”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즉각 대답했다. “어떻게 해서든지 구할 수 있는 병력을 모두 구출해야 한다.” 김 대령은 연대 내 가장 활약이 뛰어난 ‘평양 축구부’ 수색조를 급파했다. 12연대에서 수색 정찰에 가장 뛰어난 팀이었다. 평양 출신이자 축구 선수였던 젊은이들로 구성된 수색조였다. 각종 전장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여 김 대령이 애지중지하던 팀이었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급히 ‘평양 축구부’ 수색팀을 3대대가 전면적으로 공격을 당하고 있는 지역에 파견했으나 도저히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들은 겨우 3~4명에 불과한 미군을 구한 뒤 중공군의 공격을 피해 빠져나왔다.

미 8기병연대 3대대를 대상으로 중공군은 정면 공격과 함께 우회 공격 전술을 구사했다. 전통적으로 중국인들이 잘 쓰는 방식이었다. 정면으로 압박하면서 잔여 병력을 측방으로 우회해 후방을 포위하는 전법이다. 미 8기병연대 3대대는 정면 공격 외에 부대 서쪽으로 우회한 중공군 병력의 포위 공격을 받고 있었다. 정면과 측방, 후방에서 공격하면서 범위를 좁혀드는 중공군에게 3대대는 ‘독 안에 든 쥐’의 신세였다. 김 대령의 수색 정찰조가 급파됐지만 밀려드는 중공군의 공세를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3대대의 상황을 전해 들으면서 나는 마음이 아팠다. 특히 그들은 낙동강 전선에서 다부동을 방어할 때 우리 1사단의 왼쪽, 즉 좌익에 해당하는 왜관 동쪽 303고지에서 북한 인민군의 공격을 막아내다가 대대 통신소대 26명이 적에게 포로로 잡혀 전원 포박된 채 사살을 당한 부대였기 때문이다.

국군 1사단이 중공군의 1차 공세에서 살아남지 못했다는 오보가 외신으로 나간 적이 있다. 일부 미 언론이 이 전투를 보도하면서 ‘미 8기병연대와 한국군 1사단 전멸’이라고 잘못 보도했기 때문이다. 3대대의 병력 800명 가운데 이 전투에서 600여 명이 전사 또는 행방불명이 되는 처참한 결과가 빚어졌다.

미군으로서는 이 전투가 더 수치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호바트 게이 1기병사단장은 예하 5기병연대를 투입해 8기병연대 3대대를 구출하려고 했지만 실패였다. 중공군은 낮에는 산에 불을 피워 연막을 형성하면서 참호 속에 숨어 지냈기 때문에 찾아내기 힘들었다. 공격 목표를 찾을 수 없던 게이 1기병사단장은 11월 2일 마침내 철수 명령을 내렸다. 미군 역사상 예하 부대가 적의 포위에 갇혀 있는 상황을 알면서도 구출을 포기한 전례는 이제껏 없었다. 미군이 지울 수 없는 오점을 남긴 사건이었다.

백선엽 장군

목요일, 1월 07, 2010

2010 밴쿠버 동계올림픽 주요 경기장 및 정보

2010 밴쿠버 동계올림픽 주요 경기장 및 정보








2010 밴쿠버 동계올림픽은 한국 동계 스포츠 사상 최대의 관심을 불러일으킬 것 같다. 한국을 대표하는 종목인 쇼트트랙은 이번에도 효자 노릇을 할 것으로 기대되고, 김연아 선수가 한국 최초의 올림픽 피겨 금메달을 안겨줄 가능성이 크다. 또 영화‘국가대표’의 실제 주인공인 스키 점프 선수들도 메달권 진입을 노리고 있다. 이번 동계올림픽에 그 어느 때보다 관심이 집중되는 이유이다. 2010년 동계올림픽의 역사적 장면들이 연출될 밴쿠버와 휘슬러의 올림픽 명소들을 소개한다.




▲BC 플레이스 스타디움(BC Place Stadium) = 개회식과 폐회식은 밴쿠버 다운타운의 BC 플레이스 스타디움에서 열린다. BC 플레이스 스타디움은 4만㎡의 면적을 공기 지지 방식의 덮개로 씌운 북미 최대 규모의 경기장으로 겨울철의 어떤 악천후에도 대비할 수 있으며, 6만여 명을 수용할 수 있다. 1983년 개장한 BC 플레이스는 1986년 엑스포 준비 차원에서 지어졌으며 이후 BC 주의 주요 경기들이 이곳에서 개최됐다. 지난해 약 270억 원을 들여 의자, 화장실, 장애인 출입시설 등 내부 시설물을 개선하는 공사를 마쳤고, 올림픽이 끝난 후에는 지붕을 새로 교체하는 대공사가 진행될 예정이다.




▲퍼시픽 콜리세움(Pacific Coliseum) = 올림픽 기간에 한국인들의 가장 큰 관심을 받을 곳으로 밴쿠버 다운타운 동쪽의 해스팅스 공원(Hastings Park)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에서는‘피겨 퀸’김연아 선수의 활약이 기대되는 피겨스케이팅과 세계 최강인 쇼트트랙 경기가 개최된다. 이곳은 평소 아이스하키의 명소이자 다양한 행사와 콘서트가 열리는 곳으로 1968년 개장했다. 피켜스케이팅 경기는 2월 14~27일에 열리는데, 김연아 선수가 출전하는 여자 쇼트 프로그램은 23일, 프리 스케이팅은 25일에 개최된다. 또 쇼트트랙은 13일부터 26일까지 펼쳐진다.






▲리치몬드 빙상 경기장(Richmond Olympic Oval) = 밴쿠버 남쪽의 소도시 리치몬드의 프레이저(Fraser) 강변에 위치한 경기장으로,‘동계올림픽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스피드스케이팅 경기가 열린다. 파란 외벽과 은은한 갈색의 물결 모양 지붕이 유려한 건물로 목재를 많이 사용해 아름다움과 경제성, 소음 처리 효과를 모두 갖춘 대표적인 친환경 건축물이다. 스피드스케이팅은 2월 13~27일에 열리며, 한국의 이강석과 이규혁 선수의 남자 500m 경기는 15일에 개최된다.



▲캐나다 하키 플레이스(Canada Hockey Place) = BC 플레이스 스타디움 옆에 위치한 캐나다 하키 플레이스는 캐나다인들이 열광하는 아이스하키 토너먼트가 열릴 장소로, 밴쿠버 캐넉스 하키팀의 홈구장이기도 하다. 1995년 개장된 곳으로 북미에서 행사가 가장 많이 열리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UBC 선더버드 아레나(UBC Thunderbird Arena) = 밴쿠버 도심 서쪽의 브리티시컬럼비아대학교(UBC) 캠퍼스에 위치한‘선더버드 윈터 스포츠 콤플렉스’의 기존 건물을 개보수 및 증축한 곳으로 아이스하키 토너먼트와 장애인을 위한 아이스슬레지 하키가 열리는 장소이다. www.icerink.ubc.ca

▲사이프러스 산(Cypress Mountain) = 웨스트 밴쿠버에 위치한 사이프러스 산은 BC 주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키 명소 중 하나이다. 이번 올림픽에서는 프리스타일 스키와 스노보드가 개최된다. 스키 및 스노보드 대회를 감상하며 밴쿠버의 아름다운 전망까지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장소이다.



▲휘슬러 = 연간 2백만 명 이상이 방문하는 휘슬러는 북미 최고의 스키장으로 명성을 높이고 있다. 블랙콤 산에 자리한 휘슬러 슬라이딩 센터(The Whistler Sliding Centre)에서는 봅슬레이, 루지, 스켈레톤 경기가 열리고, 휘슬러 크릭사이드(Whistler Creekside)에서는 알파인 스키가 개최된다. 또 휘슬러 올림픽 파크에서는 총 3개의 개별 경기장에서 크로스컨트리 스키와 바이애슬론, 스키 점프가 진행된다. 스키 점프는 2월 12~22일에 개최된다.



▲밴쿠버 올림픽 센터(Vancouver Olympic/Paralympic Centre) = 밴쿠버 도심 남쪽의 퀸 엘리자베스 공원 인근에 위치한 것으로 동계올림픽을 앞두고 새로 건축됐다. 컬링 개최 장소로 올림픽 이후에는 다목적 레크리에이션 센터로 이용될 예정이다.



■경기장 밖에서 즐기는 동계올림픽

꼭 경기장이 아니더라도 밴쿠버의 다양한 곳에서 올림픽의 열기와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다. 동계올림픽을 앞두고 밴쿠버 다운타운의 롭슨 스퀘어(Robson Square) 야외 아이스링크가 개장돼 일반에 공개된다.



예일 타운의 데이비드램 공원(David Lam Park)에서는 대형 스크린을 통해 올림픽 경기를 생중계하고, 매일 밤 레이저 쇼와 워터 쇼가 펼쳐진다. 또 메인랜드 가(Mainland St.)와 해밀턴 가(Hamilton St.)가 보행자 전용 도로로 변신, 올림픽 경기가 생중계되는 라윌 공원(Larwill Park)까지 자유롭게 통행할 수 있다.



BC 플레이스 스타디움 인근의 콜로세움을 연상시키는 독특한 외관의 밴쿠버 도서관(Vancouver Public Library) 중앙 홀에서는 밴쿠버와 관련된 다양한 자료들이 전시되고, 그랜빌 아일랜드에서는 캐나다 정부와 불어권 커뮤니티의 다양한 행사가 펼쳐진다. 올림픽 기간에 올림픽 빌리지에서 그랜빌 아일랜드까지는 무료 순환 전차가 운행된다.



또 밴쿠버 다운타운의 서쪽에 위치한 해변인 잉글리시베이 해변(English Bay Beach)에는 캐나다 북부 원주민인 이누이트(Inuit) 족의 길을 알려주는 석상이자 동계올림픽의 공식 로고인 이눅슈크(Inukshuk)가 설치돼 있어 기념사진을 찍기 위해 많은 관광객과 선수들이 방문할 것으로 예상된다.





글/임동근 기자(dklim@yna.co.kr)ㆍ사진/연합뉴스 DB센터,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BC) 주 관광청

(대한민국 여행정보의 중심 연합르페르, Yonhap Repere)

(끝)

한국전쟁 60돌과 한국사회


[조우석 칼럼] 한국전쟁 60돌과 한국사회 <상>






[중앙일보] 기사

나도 한마디 (9)

2010.01.08 01:34 입력 / 2010.01.08 14:46 수정



진짜 영웅, 장군 백선엽



적벽대전 등 『삼국지』전투에는 해박하지만, 막상 한국전쟁의 디테일에 무신경한 이들이 적지 않다. 개전 초기 춘천 방어전투만도 그렇다. 당시 이곳의 국군 6사단은 인민군을 7일간 저지하는 데 성공했고, 그 통에 서부전선을 뚫고 내려왔던 북한군 3사단 병력을 서울에서 묶어둘 수 있었다. 춘천을 쉽게 내줬다고 가정해보라. 한강 이남 방어선 구축이 그만큼 어려웠고, 이후 전쟁양상도 바뀌었으리라. 인민군이 멈칫거리자 미군 개입에 겁먹은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진격인가, 중단인가?”(7월1일 전문)를 다그쳐 물어야 했다.



한국전쟁은 올해로 60년인데, 이 전쟁은 간단치 않았다. 정확하게 “동아시아의 국제전쟁”(중앙일보 4일자 10면)이다. 전투 하나하나와 전개양상에 세계 지도자들이 긴장했다. 양측의 땀을 쥐게 만든 게 그 해 8, 9월 다부동전투다. 전략적 중요성으로는 도솔산전투(1951년 6월), 백마고지전투(52년 10월)에 훨씬 앞선다. 왜관·대구의 관문 다부동을 내줄 경우 당시 국토의 8%(낙동강 이남)만을 가졌던 한국정부는 바로 제주도로 밀렸으리라. 이 전투의 영웅이 요즘 중앙일보 ‘남기고 싶은 이야기’를 연재하는 백선엽 장군이다.



연재 초반이라 중공군 개입의 서전인 운산전투가 소개되지만, 백 장군은 전쟁 내내 불굴의 1사단을 이끈 명장(名將)이다. 그는 지난해 펴낸 전쟁회고록 『군과 나』(재출간본)에서 “1사단의 최대 전투는 다부동에서 시작돼 다부동에서 끝을 맺는다”(96쪽)고 밝혔을 정도인데, 그게 어느 정도였을까? “인민군의 정예”라며 김일성이 자랑하던 3사단을 비롯한 적 3개 사단을 1개월여 전투에서 궤멸 내지 와해시켰다. 그게 전사(戰史)의 정설이다. 다부동전투에서 시간을 벌었기 때문에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도 가능했다.



1사단은 미군에 앞서 평양에 입성했던 선봉부대로도 유명하다. 평양 진격이야말로 “어떠한 전쟁영화도 흉내 낼 수 없는 일대 장관”(123쪽)이라고 백 장군은 훗날 감격적으로 술회했다. 거기에는 곡절이 있었다. 1사단은 개전 초기에는 적의 탱크에 밀려 1개월 이상 남쪽으로 후퇴를 거듭했고, 그의 표현대로 ‘유랑(流浪) 사단’의 신세였다. 그 점에서 다부동전투는 최악의 조건을 딛고 이룬 명 전투이고, 가히 임란 당시의 명량대첩에 비견될 만하다.



실제로 백선엽은 지난해 설문조사에서 이순신·강감찬과 함께 역사 속의 전쟁영웅으로 꼽혔다. 하지만 웬일인지 그에 대한 예우는 미국이 더 극진하다. 포트 베닝 육군보병학교는 살아 있는 전설(living legend)인 그의 육성녹음을 들려주는 전시관을 지난해 마련했다. 역대 주한미군사령관도 이·취임사를 “존경하는 전쟁영웅 백선엽 장군님!”으로 시작하는 게 오랜 관례다.



그러면 한국사회는 자기의 영웅에 왜 무심할까? 한국전쟁에도 심드렁하거나 남침·북침을 헷갈릴까? 가히 연구대상이다. 사람들은 한국전쟁은 먼 얘기이고, 국가안보쯤이야 독재시대의 구호라고 치부한다. 백선엽에는 무신경하면서도 미 남북전쟁의 로버트 리 장군은 멋지다고 본다. 이런 인식의 혼란이 없다. 한국사회 전체가 ‘평화의 덫’ ‘문약(文弱)의 덫’에 걸린 모양새다. 한국전쟁 60년 음미가 의미 있으려면 이런 사회병리까지 치유해야 옳다.



조우석 <문화평론가>

조우석 기자 [wowow@joongang.co.kr]

[토요인터뷰] 북한군에 맞서 나라 지킨 백선엽 장군

[토요인터뷰] 북한군에 맞서 나라 지킨 백선엽 장군




[중앙일보] 기사

나도 한마디 (18)

2010.01.02 02:26 입력 / 2010.01.02 07:29 수정



“6·25는 서구 문물이 본격적으로 상륙하는 계기였고

그로 인해 한국은 자유·민주 지켜내고 산업화 성공”



신년 기획 - 세계의 한복판으로 [2]

6·25전쟁 60년 -상처를 딛고 평화의 시대로




국군 1사단장과 1군단장, 야전전투사령부 사령관과 육군참모총장을 맡으며 6·25전쟁을 치렀던 백선엽 예비역 대장이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 앞에서 당시를 회상하고 있다. [김태성 기자]




1950년 10월 19일 평양 수복 직후 미 제1군단장 밀번 소장(오른쪽)과 작전을 논의하고 있는 백선엽 1사단장.











60년 전인 1950년 6월 25일 이 땅에서 전쟁이 벌어졌다. 공산주의 북한이 남침하면서 벌어진 싸움이었다. 대한민국은 공산주의의 야욕을 막아냈다. 여러 사람이 전쟁터에 나가 목숨을 걸고 싸웠다. 그중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군인이 있다. 올해 90세의 백선엽 예비역 대장이다. 한국전쟁에서 벌어진 유명한 전투에는 그의 이름이 반드시 오른다. 그는 현장에서 싸움을 지휘하면서 전쟁 국면을 바꾸는 결정적인 승리를 여러 번 일궈냈다. 6·25전쟁 발발 60주년을 맞는 올해 그의 감회는 남다르다. 그때의 비극이 점차 ‘잊혀진 전쟁’으로 치부되는 요즘의 사회 분위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건국 2년이 안 된 시점에서 벌어진 전쟁. 국가가 맞이한 이 최대의 위기에서 현장을 누비며 싸움을 승리로 이끈 노병(老兵)이 중앙일보에 회고록을 연재키로 했다. 그에 앞서 그에게 한국전쟁의 의미를 들어 봤다. 지난달 22일 용산의 전쟁기념관 안에 있는 그의 사무실에서다.



글=채인택·유광종 기자

사진=김태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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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과 대한민국 군대



-60년 전의 전쟁을 총체적으로 평가한다면.







“너무 아픈 희생이 있었다. 그러나 다른 측면의 평가도 가능하다. 누가 무엇인가를 줄 때 그를 받을 수 있는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는 아주 중요한 문제다. 한국전쟁은 미국으로 대변되는 서구 문물이 본격적으로 한반도에 상륙하는 계기였다. 한국은 미국의 우수한 문물을 제대로 받아 소화한 대표적인 나라다. 그로 인해 한국은 자유와 민주의 가치를 지켜낼 수 있었고 전쟁이 끝난 뒤에도 결국 산업화에 성공함으로써 세계적인 강국으로 올라설 수 있었다. 6·25전쟁은 분명 동족이 서로 피를 흘리는 비극이었지만 대한민국이 거듭 태어나는 전기로도 작용했다. 피를 흘리며 쓰러져 간 대한민국의 전몰 용사와 누계로 300만 명에 달하는 미군과 연합군 병사의 피와 땀이 그 속에는 숨어 있다.”






-전쟁으로 대한민국 군대는 어떻게 달라졌나.



“창군 뒤 10개 사단으로 시작한 한국의 군대는 전쟁을 겪으면서 20개 사단, 60만 명의 대군으로 성장했다. 전쟁 막바지에는 한때 70만의 대군이었다. 미국의 군사 시스템이 한국 군대에 그대로 이식됐다. 한국군이 우수했기에 무기와 물자, 군사력 운용 체제 등 세계 최강의 미국 군대의 우월성을 고스란히 흡수할 수 있었다. 미국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1952년 12월 당선인 자격으로 한국을 방문했을 때 육군 참모총장이었던 내가 직접 브리핑을 했다. 종전 뒤 미군 병력의 일부 철수가 필요하다면 이를 메울 한국의 국방력을 키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 뒤로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다. 그때에는 평균 두 달에 1개 사단을 만드는 경우도 있었다.”



-미국의 지원은 어느 수준으로 이뤄졌나.



“155마일 휴전선에 모두 16개 사단의 한국군을 배치하는 큰 작업이었는데, 당시 한국의 재정 규모로는 이를 감당키 어려웠다. 미국이 모든 것을 댔다. 급식을 지원하는 것은 물론 기름·탄약·무기 등을 그대로 넘겨 줬다. 미국의 지원으로 한국의 군사력만이 강해진 것이 아니다. 미국은 매년 3000만 달러의 경제 원조를 했다. 인천의 유리 공장, 충주의 비료 공장 등이 미국의 자본과 기술로 지어졌고, 모자라는 비료는 미국이 일본에서 구입해 한국에 원조하는 식이었다. 이러한 미국의 지원은 결국 한국 경제의 발전을 이루는 토대로 작용했다.”



-미국은 다른 여러 국가들에도 지원을 했다.



“한국은 미국의 원조를 토대로 일어선 유일한 국가다. 필리핀과 남베트남 등 여러 나라가 같은 경우이긴 했지만 우리와는 달랐다. 그들은 미국의 문물과 문화를 순조롭게 소화하지 못했다. 한국은 이를 제대로 소화함으로써 자력으로 나라를 유지할 수 있었고, 오랜 꿈이었던 부국(富國)과 강병(强兵)의 꿈을 실현했다. 한국전쟁은 뼈아픈 동족상잔의 상처에도 불구하고 대문을 활짝 열어 세계 무대로 나아가는 기틀을 만든 계기로 볼 수 있다.”



-전쟁 때의 한국군과 지금의 군을 비교한다면.



“한마디로 천양지차다. 창군 초기에는 일제가 남긴 99식 소총으로 무장했다. 48년에 미군이 소총 등 일부 무기를 한국군에 지급하기 시작했는데, 그것도 경찰 위주였다. 한국 경찰에는 M1 소총 등을 지급하면서도 군에는 주지 않았다. 당시 경찰이 주(主), 국방경비대(국방부 전신)는 보조였던 셈이다. 비행기와 탱크는 물론 대포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미군정이 철수하면서 한국에 남은 미 군사고문단의 협력과 전쟁 때 수많은 미군 병력이 들어오면서 한국군도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지금의 한국군은 세계에서도 알아주는 강군(强軍)이다. ”



미군과 중공군 평가하자면







-6·25전쟁 중에 여러 유명 미 장군들과 함께 작전을 펼쳤다.



“최상위 급의 전략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에게서 강한 인상을 받았다. 대범하면서도 천재적인 전략 구사가 특징이었다. 그러나 사소한 것에 대한 부주의로 여러 가지를 잃기도 했다. 중공군 개입에 대한 오판이 북진통일을 앞에 둔 시점에서 결정적인 패착으로 작용했다. 맥아더 장군 본인이 주변 참모에 의해 귀가 막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전에 대한 열정과 자유·민주라는 가치에 대한 확고한 신념 등으로 무장한 훌륭한 장군이었다.”



-다른 지휘관들은 어땠나.



“모두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전쟁 영웅들이다. 월턴 워커(1889~1950, 주한 미8군사령관, 6·25전쟁 당시 직함) 장군과 매슈 리지웨이(1895~1993, 극동연합군 최고사령관), 프랭크 밀번(1892~1962, 1군단장), 제임스 밴 플리트(1892~1992, 8군사령관), 맥스웰 테일러(1901~1987, 8군사령관) 등 미군의 최고 엘리트들이 전쟁을 이끌면서 한국군에 많은 것을 보여줬다. 그들의 사고방식과 전쟁을 이끄는 방식 등을 우리 군대가 보고 배웠다.”



-미군의 특징을 꼽는다면.



“보급과 무기 체계가 세계 최고의 군대다. 그러나 낮에는 싸움을 잘하지만, 야간에는 전투력이 떨어진다. 기동력, 공군 지원 등이 탁월하지만 야간 전투에 약해서 야밤에 쳐들어오는 중공군을 힘에 겨워 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상황을 보더라도 세계 최강의 군대인 것만큼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다.”



-중공군은 어땠는가.



“매복이 가장 큰 특징이다. 전투를 잘하는 편이다. 야간에 공격해 올 때 피리와 꽹과리 등을 부는데, 당하는 입장에서 보면 마음을 마구 흔들어 놓는 방법이다. 교란전술이다. 우회와 포위 작전 등 다양한 전술을 구사한다. 그러나 보급이 약했다. 보급선이 길어지면서 전력이 크게 약해지는 면모를 보였다.”



6·25 전쟁이 남긴 교훈은







-한국전쟁은 무엇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가.



“내가 태어나기 전에 우리는 나라를 잃었다. 부국강병(富國强兵)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선 안보를 튼튼히 해야 한다. 전쟁으로 인해 우리는 세계적으로 일어설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미국과 유엔 여러 국가들의 참전과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먼저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군인과 민간인들에게 감사해야 하고, 외국인으로서 한반도의 전쟁에 뛰어든 미군과 유엔군들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이런 희생과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존재한다. ”



-이제 미국과 중국이 주도하는 G2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



“당시 중국이 북한을 지원해 참전했다. 한국군과 미군은 50년 말부터는 북한군과 싸운 것이 아니고 사실상 중공군과 전쟁을 벌였다. 그러나 이제 중국은 적이 아니다. 친구로 잘 사귀어야 할 때다. 중국은 ‘대륙세력’이다. 미국은 그에 비해 ‘해양세력’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새로 부상하는 중국이라는 대륙의 세력과 잘 사귀기 위해서는 먼저 한반도의 안보 상황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것이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다. 말하자면 미국과의 안보 동맹을 철저하게 다지는 것이 우선이다. 그 다음에 중국과 함께 발전하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스스로 힘을 키우는 것이 최우선 과제지만 미국과 튼튼한 안보 동맹을 다지는 것 또한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요즘의 세대에게 남기고 싶은 말은.



“국민을 이끄는 지도자들이 60년 전 이 땅에서 벌어졌던 동족상잔의 비극을 자주 언급해야 한다. 전쟁이 남긴 여러 가지 교훈을 되새겨야 한다는 말이다. 6·25전쟁은 한민족이 치른 비극적인 대전이었다. 동시에 미군과 연합군, 그리고 중공군이 참여해 벌어진 국제적인 전쟁이었다. 통일을 이루지 못해 늘 아쉬움이 있지만 그래도 우리는 그 전쟁을 겪으면서 산업국가로 올라섰다. 자유민주주의에 입각한 국가의 기반을 확고히 지키고 키웠다. 우수한 국민이 있어서 다 그렇게 된 것이다. 전방에 120만 병력을 배치하고 늘 위협을 해오는 북한이 아직 존재한다. 백성들을 굶기면서 말이다. 그 점에서 다시 강조하지만, 안보를 튼튼히 해야 한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기초가 국가안보다.”



6·25 전쟁의 산증인 ‘첫 한국군 4성 장군’ 백선엽은 누구





1950년 6월 25일. 동족상잔의 비극이 시작된 바로 그날 아침 국군 1사단장이었던 백선엽 대령은 서울 신당동 집을 나섰다. “전쟁이 터졌다”는 사단 참모의 전화를 받고서였다. 열흘 전부터 경기도 시흥에서 교육을 받고 있던 때여서 집에서 출퇴근을 하던 상황이었다. 그는 육군본부에 가서 “사단 복귀를 허락해 달라”고 요청한 다음 바로 전쟁터를 향해 달렸다. 그로부터 10개월이 지난 51년 4월.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선이 남쪽으로 밀렸다가 겨우 회복된 뒤 2군단장으로 승진해 이승만 대통령에게 진급 신고를 하기 위해 부산의 임시 경무대를 방문했을 때다. 그는 그때서야 모친과 아내, 그리고 세 살 된 딸과 재회했다. 개전 이후 첫 만남이었다. 부산의 지하 방 한 칸에서 어렵게 생활하던 가족이다. 개전 초 서울이 북한군에 점령당했을 때 가족은 용케도 살아남았다. 물론 가장의 도움은 없었다. 서울을 지나 평양으로 북진할 때도 가족에게 연락조차 하지 않았다.



“가족에게서 원망도 많이 받았겠다”는 질문에 백 장군은 “다 그런 거지”라며 더 이상 묻지 말라는 뜻으로 손사래를 쳤다. 그는 그런 군인이다.



그는 한국전쟁에서 첫손가락에 꼽는 ‘대승(大勝)의 장군’이다. 기념비적인 여러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둔 사람이라는 뜻이다. 전쟁 초에 인민군의 공세에 밀려 대한민국이 경남과 경북 일부만을 남겨두고 있던 낙동강 전선. 그의 1사단은 대구 북방의 다부동전투에서 기적적인 승리를 거뒀다. 인민군 총공세의 예봉을 꺾고 북진통일을 향해 나아가는 토대를 이룩한 승리였다. 김일성 치하의 북한 수도인 평양에 처음 입성한 군대도 그의 1사단이다.



제1사단장, 제1군단장, 휴전회담 초대 한국대표, 제2군단 재창설 등 주어진 임무를 그는 훌륭히 이행했다. 당시 작전권을 갖고 있던 미 8군의 주요 지휘관들은 아무런 백그라운드도 없는 청년 장군 백선엽을 주목한다. 이에 따라 그는 한국군 역사상 첫 4성 장군에 오른다. 그의 나이 33세 때다.



한국전쟁 발발 직전 군대 내부의 좌익 군인들을 제거하는 숙군(肅軍) 작업을 맡았고, 이 과정에서 붙잡힌 박정희(당시 소령) 전 대통령의 사면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그는 54년 한국과 미국의 상호 방위조약을 이끌어 낸 숨은 주인공이다.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전 미국 대통령,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을 비롯한 미군 영웅들을 6·25전쟁 중 만났다. 이들로부터 미국의 군사지식을 배우고 익혔다.



이런 경험은 그가 두 차례 대한민국 육군 참모총장을 역임하면서 한국군의 실력을 키우고 넓히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군복을 벗은 뒤에 그는 외교관으로 10여 년 해외를 누볐고 70년대 초반에는 교통부 장관 자격으로 서울의 지하철 1호선을 깔 토태를 만들기도 했다. 대한민국 중공업하면 ‘포철 박태준’이지만 화학공업 발전의 토대가 백선엽에 의해 만들어진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는 1971~80년 9년 동안 충주·호남 비료 사장과 한국종합화학 사장을 역임하며 이땅의 화학공업 기반을 닦았다.  



유광종 기자

채인택 기자 [ciimccp@joongang.co.kr]

유광종 기자 [kjyoo@joongang.co.kr]

김태성 기자 [tskim@joongang.co.kr]

[6·25 전쟁 60년] 운산 전투 -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⑤ 급박했던 후퇴 명령

[6·25 전쟁 60년] 운산 전투 -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⑤ 급박했던 후퇴 명령







1950년 10월 말 벌어진 운산 전투에서 중공군에 포로로 잡힌 미군의 모습이 중공군 사진사의 앵글에 담겼다. 중국이 펴낸 전사자료집에 등장하는 사진이다. 잡힌 포로들은 그해 10월 31일 중공군과의 전투에서 패한 미 1기병사단 소속 8기병연대 3대대 대대장과 부대원들로 추정된다. [백선엽 장군 제공]






6·25전쟁 초기 미군 1기병사단을 지휘한 게이 소장(왼쪽)과 기동력을 상징하는 말이 그려진 사단 마크.





철수 결정한 밤 “적, 적이 진지 안으로 … 쾅” 미군 긴급 무전





후퇴를 건의하는 미군 10고사포단장 윌리엄 헤닉 대령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그는 나와 대구 북방의 낙동강 전선에서 처음 만나 이곳 최전선까지 함께 전투를 겪어왔다. 그전까지 그는 늘 여유가 있었고, 차분한 사람이었다. 당황하는 기색은 좀처럼 볼 수 없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날 운산에서 본 그의 표정은 예전과는 확연히 달랐다.



‘아무래도 후퇴를 해야 하는가’. 나는 천신만고 끝에 평양을 거쳐 이곳에 진출하기까지의 상황들을 되돌아봤다. 이제 조금만 더 북진을 하면 최종 목표인 압록강 수풍댐에 도달할 수 있는 상황인데….



그러나 다행히도 나는 그 직전에 사흘 동안 군단장 자리에 있으면서 운산 이외의 상황을 폭넓게 살펴볼 수 있었다. 우리 1사단의 동쪽에서 작전 중이던 국군 2군단의 상황도 매우 심각했음을 알게 됐던 것이다. 2군단의 예하 2개 사단은 대규모로 포진한 중공군 병력에 노출돼 있었고, 특히 6사단의 2개 연대는 압록강변까지 진출했다가 고립돼 매우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서둘러야 했다. 동부전선의 상황은 알 수 없었지만 국군 1사단이 싸우는 운산과 동쪽으로 인접한 2군단은 위기에 직면하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가장 현실적인 판단은 무엇인가. 나는 후퇴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후퇴도 작전이다. 적이 강하면 일단 물러나 반격의 기회를 잡아야 한다. 나중에 반격을 하려면 손실을 최소화하면서 병력과 물자를 무사히 안전한 곳으로 이동시켜야 한다.



헤닉 대령에게 물었다. “포탄이 얼마나 남았나.” 헤닉은 “1만5000발 정도 남아 있다”고 대답했다. 나는 “만약 우리가 오늘밤 중으로 철수한다면 그 화력을 적 정면에 집중적으로 사용할 수 있겠는가”고 물었다. 그는 “기꺼이 그렇게 하겠다”고 답했다.



이제 프랭크 밀번 미 1군단장을 비롯한 상부의 허락을 얻는 작업이 남았다. 나는 지프로 영변 쪽으로 내려간 뒤 다시 미 1군단 본부가 있는 신안주로 달려갔다. 길이 험했다. 아니, 내 마음이 급했는지 모른다. 빠른 속도로 달려가다가 커브길에서 그만 차량이 뒤집히고 말았다. 다행히 지프 위에 있던 기관총 받침대가 엎어진 차량을 지탱해 주었다. 목숨을 잃을 뻔한 큰 사고였다. 가까스로 다시 길을 달려 미 1군단 군단 본부에 도착했다. 미 1기병사단장 호바트 게이 소장도 마침 그곳에 있었다. 나는 “오늘 중으로 철수해야 한다. 전선 상황이 너무 급박하다”고 말했다. 밀번 미 1군단장은 심각한 표정으로 내 말을 경청했다. 그는 이어 전화기를 들어 월튼 워커 미 8군 사령관에게 상황을 보고했다.



다소 긴 통화를 마친 그는 “오늘 밤 안으로 철수가 가능하냐”고 물어왔다. 나는 밀번 군단장에게 “적의 전방으로 포를 쏘아 탄막(彈幕)을 형성하면서 전선 병력을 철수하기로 헤닉 대령과 합의했다”고 설명했다.



밀번 소장은 철수 명령을 내렸다. 국군 1사단은 즉시 운산에서 빠져 나와 입석(立石)과 영변을 잇는 선까지 남쪽으로 철수하라는 내용이었다. 그는 게이 미 1기병사단장에게 국군 1사단의 후퇴를 엄호하라고 명령했다. 평북 서부지역에서 신의주 방면으로 진격하던 미 24사단에도 후퇴 명령을 내렸다.



나는 밀번 군단장의 명령이 떨어지자 곧장 전화로 운산에 머물고 있던 3개 연대 연대장에게 후퇴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게이 소장과 함께 그의 미 1기병사단 사령부로 향했다. 이때 그의 예하 8기병연대는 용산동이란 곳을 지나 운산을 향해 동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철수 명령에 앞서 미 8기병연대는 국군 1사단 작전지역을 지나 북진하라는 명령을 받은 상태였다. 그들은 운산으로 향하는 두 갈래 길 가운데 서쪽 도로를 택했다. 국군 1사단의 퇴로인 동쪽 도로와는 산 하나를 가운데 둔 길이었다. 이 길이 ‘생사를 가르는 길’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밀번 군단장과의 회의를 마친 뒤 게이 소장과 그의 사단 사령부에 도착한 때는 1950년 10월 31일 자정 무렵이었다. 사령부에 들어서자마자 숨이 넘어가는 듯 급박한 목소리가 들렸다. 8기병연대와의 무전 통화였다.



“흑흑(거친 숨소리). 적, 적, 적병이 전차에 기어오르고 있다.” 이어서 “콰-쾅” 하는 폭발음이 무전기에서 새어 나왔다. “적이 우리 진지 안으로 들어오고 있다.” “전차 위에 적들이 올라탔다.” “따다다다다당-.”



충격적이었다. 이동하던 미군이 중공군의 기습을 받은 것이다. 총성과 폭음, 그리고 고함소리가 무전기 스피커를 통해 끊임없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운산전투 현장에서 들려오는 끔찍한 소리를 직접 듣게 된 것이다.



백선엽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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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 돋보기] 미 1 기병사단

미군 1호 기록 제조기

평양 첫 입성 노렸지만

국군에 15분차로 뒤져



1921년 9월 멕시코와의 국경지대 순찰을 위해 기병 중심의 부대로 창설됐다. 제2차 세계대전 때인 45년 1월 필리핀 마닐라 1호 입성의 기록을 세웠다. 일본 항복 뒤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 호위를 맡아 미군 부대 가운데 처음으로 도쿄에 입성했다. 점령군으로 일본에 주둔하면서 군기가 떨어지고 병력도 40% 줄어 전력이 약화됐다. 그런 상태에서 6·25전쟁에 투입돼 초기에 상당히 고전했다. 북진 공격 때 평양 1호 입성을 노렸으나 15분 먼저 도착한 국군 1사단에게 선두를 뺏겼다. 현재는 병력 1만7000명으로 4개 여단, 1개 항공여단으로 이뤄져 있다. 보스니아 평화유지 활동을 벌이다 99년 미국 텍사스 포트블리스에 돌아가 주둔 중이다.



6·25전쟁 초기 사단을 지휘한 호바트 게이 소장은 2차대전의 전차전 영웅 조지 패튼 장군의 참모장으로 유럽전선에서 활동했다. 45년 12월 패튼이 독일 하이델베르크 근처에서 치명적인 자동차 사고를 당할 때 같은 차 옆자리에 타고 있었으나 목숨을 건졌다.

[6·25 전쟁 60년] 운산 전투 -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④ 급박해진 후퇴

[6·25 전쟁 60년] 운산 전투 -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④ 급박해진 후퇴




커브 길 돌자 300m 앞 중공군 … 적 총구 보자마자 “차 돌려”




1950년 10월 31일 평안북도 운산에서 중공군 1차 공세에 직면한 국군 1사단의 백선엽 사단장(왼쪽)이 미군 10고사포단 윌리엄 헤닉 대령(앞줄 오른쪽)과 함께 걸으며 후퇴 작전을 상의하고 있다. 쌀쌀한 날씨인데도 하복 차림인 것이 눈길을 끈다. [백선엽 장군 제공]




백선엽 장군(오른쪽)이 1950년 운산 전투 당시 사단 운송부 군무원으로 참전했던 고덕환 목사와 지난해 12월 21일 만났다. 두 사람이 용산 전쟁기념관의 백 장군 사무실에서 지도를 들여다보며 당시를 회고하고 있다. [오종택 기자]



내가 타고 있던 지프에서 불과 300m 앞에서 중공군이 총구를 겨누고 있었다. 굽은 길 저 앞이었다. 1만여 명의 병력과 배속 미군을 지휘하는 국군 1사단장인 내가 적의 총구 앞에 고스란히 노출된 상황이었다. 차 안에는 운전병과 문형태 사단 참모장 등 세 명이 타고 있었다. ‘뭐 이런 경우가 다 있을까’라는 낭패감은 차라리 사치에 가까웠다.



나는 황급히 “차를 돌려라”라고 명령했다. 당시 내 지프에는 조그만 트레일러가 붙어 다녔다. 현장 지휘를 하기 위해 야전에서 지내는 데 필요한 모포와 텐트 등을 싣는 용도였다. 이게 말썽이었다. 좁은 길을 급히 돌려고 하니 트레일러가 걸렸다. 운전병은 급히 지프에서 내려 일단 트레일러를 떼냈다. 그런 다음 차를 돌리고 다시 트레일러를 뒤에 건 다음에 출발했다. 적을 만날 당시 내가 탄 지프 뒤에는 트럭 한 대가 따르고 있었다. 이 트럭은 차를 돌리는 우리를 보자 급히 후진해서 사지를 빠져나갔다. 하도 다급해서 탈출에 몇 분이 걸렸는지 잘 모르겠다. 낙타머리 길의 초입을 벗어난 우리는 다시 길을 달려 운산으로 향했다. 이상한 것은 중공군이 사격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유가 궁금할 따름이다.



최근 노신사 한 분이 나를 찾아왔다. 원주에서 목회를 하는, 올해 87세의 고덕환이라는 목사분이다. 그분은 나와 만나기 전 편지를 한 통 보냈다. 6·25전쟁 초기 내가 지휘하던 국군 1사단 11연대 수송부에서 군무원 신분으로 운산 전투에 참가했다고 했다. 그분이 편지에서 묘사한 당시의 전장 상황은 이렇다.



“10월 하순의 어느 날 밤이었습니다. 1사단 11연대에 배속된 나는 약 8㎞ 떨어진 산에서 갑자기 ‘따콩 따콩’ 하는 소리와 함께 신호탄이 올라가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고요한 달밤의 정적을 뒤흔드는 꽹과리와 피리 소리가 함께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부대의 박격포는 신호탄이 올라오는 곳을 향해 불을 뿜었습니다. 산 속에서 보이지 않는 적이 우리 쪽을 향해 계속 사격을 해댔습니다. 본격적인 야간 전투의 시작이었습니다. 이때 의무 장교 한 사람이 나타나더니 나에게 100m 앞에 있는 지프를 가리키며 “저 차를 가져오라”고 명령했습니다. 나는 그 명령에 따라 지프를 향해 뛰어가면서도 ‘이제는 내 차례인가 보다’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누구나 죽을 수도 있는 상황, 이제 그것이 내게 닥쳐 왔다는 불안감이었습니다. 가서 보니 미군 지프였습니다. 차는 길가 도랑에 오른쪽으로 기울어져 있었습니다. 처음 지프를 몰던 미군은 부상을 당해 이미 후송됐고, 뒤를 이어 국군이 이 지프를 몰고 가다 총에 맞은 상황이었습니다. 그 국군 병사는 도랑에 굴러 넘어져 있었습니다. 그는 그 속에서 처절한 소리로 울부짖고 있었습니다. “살려 달라”는 소리만 귀에 들어왔습니다. 고랑에 뛰어들어 군인을 꺼내 올렸습니다. 엔진을 걸어 차를 움직여 보았습니다. 한쪽 손으로 군인을 붙잡고 조심스레 차를 고랑에서 빼냈습니다. 그리고 의무 장교에게 와서 차와 부상 군인을 인계했습니다.”



고 목사님은 올해 6·25전쟁 60주년을 맞이하면서 감회가 새로워 편지를 보냈다고 했다. 그가 겪었던 그 처절한 상황이 나로 하여금 그 아팠던 당시의 기억을 다시 불러일으켰다. 당시 중공군은 1사단 정면을 우회해 산 속 여기저기에 포진한 뒤 포위 공격을 가하고 있었다. 낮에는 그나마 포병과 전차, 그리고 공중 지원으로 버텼으나 밤에는 고립된 채 중공군의 야간공격에 맞설 수밖에 없었다.



나는 지체할 수 없다는 판단을 했다. 중공군은 밤 시간을 이용해 묘하게 불안감과 공포감을 자극하는 피리 소리와 함께 공격을 가해왔다. 피리 소리는 개전 초 북한군의 전차 소리만큼이나 공포심을 자극했다. 적유령 산맥을 넘어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은 하복 차림의 우리 장병에게 또 하나의 적이 되고 있었다.



10월 31일. 나는 다시 운산에 갔다. 먼저 미군 10고사포 단장인 윌리엄 헤닉 대령을 만났다. 그는 아주 일그러진 표정으로 “아무리 생각해 봐도 오늘 밤을 견디기 어려울 것 같다”고 말했다. 나는 “왜 투지를 보이지 않느냐”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백 장군님, 솔직히 말해서 오늘 중에 철수하지 않으면 전멸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국군 1사단을 지휘하는 프랭크 밀번 미 1군단장에게 철수를 건의하라는 충고도 했다. 나는 곤혹스럽지만 현실을 주시해야 했다.



나는 다시 일선에 있는 11, 12, 15연대를 돌면서 연대장들을 만났다. 한결같이 “현재 상황이 너무 심각하다”고 말했다. 운산 북쪽으로 진출한 15연대의 상황이 가장 심각했고, 나머지 연대도 상당히 위험하다는 것이었다. 사면초가였다.



백선엽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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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 돋보기] 윌리스 MB·포드 GPW


625 전장 누빈 지프의 원조



6·25전쟁 때 한반도를 누빈 지프는 미 육군이 제2차 세계대전 때 개발한 지휘관용 차량이다. 야전에서 사용하기 위해 차량 덮개를 없앴다. 원래 이름은 ‘윌리스(Willys) MB’ 또는 ‘포드(Ford) GPW’였다. 미국의 자동차회사인 윌리스와 포드가 생산해서다. 지프라는 이름은 1941년 2월 워싱턴데일리뉴스 기자가 처음 사용했다. 지프(jeep)는 ‘사용해보지 않은 새로운 것’ ‘신병’이란 뜻이다. 당시 지프 차량이 신기해 보였기 때문이다. 지프는 41∼45년 64만 대가 생산돼 유럽·아프리카 전선과 태평양전쟁에 투입됐다.

[6·25 전쟁 60년] 운산 전투-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③ 이상한 명령들

[6·25 전쟁 60년] 운산 전투-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③ 이상한 명령들




압록강 ‘물 뜨기’ 서두르다 고립 … “탄약 바닥” 다급한 무전

군인은 명령에 따라 살고 죽는다. 국가의 안전을 지키고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내려진

명령에 따라 작전을 수행한다. 살고 죽는 것은 그다음의 문제다. 때로 이해하기 힘든 명령도 있긴 하다.

평안북도 운산에서 심상찮은 조짐이 나타나고, 뒤 이어 중공군이 여기저기서 출몰하면서 대규모 공세를 예고할 즈음이었다. 이때 내게 명령이 하나 내려왔다. 지금 입장에서 보면 이상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내용이었다. 당시 최전선엔 위기의 조짐이 분명히 보이고 있었다. 10월 24일 첫 중공군 포로가 잡혔고, 수색을 나갔던 미군 전차가 적의 피로 시뻘겋게 변한 채 돌아오지 않았던가. 그러나 나는 돌연 2군단장에 임명됐다.

2군단 사령부는 1사단 사령부가 있던 평북 영변에서 평안남북도의 경계인 청천강을 건너 남쪽에 위치해 있었다. 평안남도 개천군 군우리였다. 1사단장에서 2군단장으로 영전한 셈이었지만 마음속으로는 무거운 불안감이 짓눌렀다. 그러나 명령은 명령이었다. 유재흥 2군단장은 육군참모본부 차장으로 발령이 나 서울로 가버리고, 내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2군단에 부임한 나는 곧바로 상황을 점검했다. 1사단의 동쪽에서 나란히 북진하던 2군단도 상황이 급박했다. 2군단 참모장 이한림 준장과 작전참모 이주일 대령은 전방에 중공군 대군이 출현했다고 보고했다.

우선 6사단이 문제였다. 6사단은 6·25 개전 초 춘천에서 적의 발목을 잡은 덕분에,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의 추가 남하를 사흘 동안 지연하는 데 성공해 유엔군이 개입할 시간을 벌어줬던 역전의 부대다. 북진에 나선 6사단은 최종 공격 목표 지역인 압록강 초산에 거의 접근했지만, 이제 중공군 병력에 의해 포위된 상태에서 힘겨운 전투를 막 시작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김종오 6사단장은 내가 군단장으로 부임하기 직전 차량 사고로 턱을 크게 다쳐 말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태로 후송됐다.

6사단 7연대(연대장 임부택 대령)는 전체 사단 병력 가운데 최선봉을 담당했다. 7연대는 영월 지역 광공업 회사들이 보유했던 각종 차량 100여 대를 확보하고 있어 그만큼 기동력이 좋았다. 북진 과정에서도 이들은 뛰어난 기동력으로 압록강에 선착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였다. 이른바 ‘압록강 물 먼저 뜨기 작전’을 벌였던 것이다. 압록강에 가장 먼저 도착해 남북 통일을 상징하는 ‘물 뜨기’ 임무를 완수하는 것은 국군 지휘관 누구라도 얻고 싶은 영예였다. 그러나 7연대는 지나치게 서둘렀다. 다른 부대와 고립된 채로 진격하던 이들은 군단 사령부로 다급하게 무전을 때렸다. “탄약과 보급품이 바닥났다. 급히 공수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6사단 2연대(연대장 함병선 대령)도 중공군의 포위로 산중에 갇혀 버렸다. 급했다. 일단 이들에게 탄약과 보급품을 공수해줬다. 군단에 나와 있던 미 공군 연락 장교를 통해서였다. 2군단 예하 8사단도 중공군의 공세에 기가 꺾여 있었다. 이성규 8사단장은 “중공군 출현으로 부대원들의 사기가 크게 떨어지고 있다”고 보고했다.

이상한 일은 서울로 떠났던 유재흥 장군이 사흘 만에 군우리의 2군단 사령부에 다시 나타났다는 것이다. 유 장군은 대뜸 “다시 돌아가라고 그러네”라고 말했다. 원대복귀를 뜻하는 말이었다. 유 장군이 다시 2군단장을 맡았고, 나는 다시 청천강을 건너 1사단장으로 복귀했다. 급박한 전선에 있는 장수를 상대로 왜 그렇게 황당한 인사명령과 번복이 이뤄졌는지는 지금도 알 수 없다. 추측하건대 첫 인사명령이 떨어지자 이 지역 담당 프랭크 밀번 미 1군단장이 급박한 전선 상황을 걱정해 한국군 측에 인사명령을 재고해 달라고 부탁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10월 29일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신성모 국방장관과 정일권 참모총장을 대동하고 평양을 방문했다. 1사단장으로 복귀한 나는 상황을 정리하느라 이 대통령을 영접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 대통령이 평양에서 10만 군중을 상대로 감동적인 연설을 한 뒤 떠날 때는 내 지프로 비행장까지 모셨다. 이 대통령이 탑승한 미군 C-47 수송기에는 태극기가 선명하게 그려져 있었다. 대한민국 대통령에 대한 당연한 의전이었다. 비행기 안으로 들어가는 이 대통령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나는 급히 1사단 사령부로 되돌아갔다.

운산에서는 드디어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아주 심각한 상황이 여기저기에서 나타나고 있었다. 나는 지프를 몰아 영변의 1사단 사령부를 거쳐 운산으로 향했다. 구룡강의 굽이가 여러 개 겹쳐져 구불구불한 협곡을 형성하고 있던 이른바 ‘낙타머리 길’의 초입에 들어설 때였다. 나는 그곳에서 중공군의 총구에 직면했다.

백선엽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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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 돋보기] C-47


2차대전 활약 미군 수송기

평양수복 때 이승만 타고 가

국군의 평양 수복 행사에 가기 위해 1950년 10월 29일 이승만 대통령이 탔던 C-47 스카이트레인(Skytrain: 하늘의 열차)은 제2차 세계대전 때 많은 활약을 했던 수송기다.

영국의 윈스턴 처칠 총리와 미국의 유럽연합군 총사령관이었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장 등 연합국 지도자들도 자주 이용했다.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태평양전쟁 때 C-47을 타고 뉴기니와 버마 등 동남아 지역을 날아다녔다. 미국 더글러스 항공사가 생산한 C-47은 41년 12월 처음 비행한 뒤 모두 1만 대 이상이 생산됐다. 28명의 중무장 병력을 태울 수 있어 병력 수송에도 활용됐다. 기내에 의료장비를 갖추고 세 명의 의료진과 14명의 부상병을 수송할 수 있었다.






1950년 10월 북한을 지원하기 위한 중공군 병력이 군악대의 연주 속에 압록강을 줄지어 건너고 있다. 약 30만 명의 중공군이 그해 10월 중순쯤 한반도로 잠입했다. [중앙포토]






1950년 10월 말 압록강변 초산에 도착한 국군 6사단 7연대 병사가 압록강 물을 수통에 담고 있다. [중앙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