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권총 이야기(II)
박재광 전쟁기념관 교육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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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부터 기병용으로 사용된 권총은 빠른 속도로 자리를 잡아 나갔다. 당시 유럽의 모든 군대는 기병의주무기로 권총(피스톨)을 채택했다. 최고의 피스톨 병은 ‘라이터(reiter:기병)’로 알려진 독일 기병이었다. 이들 병사는 검은 갑옷을 입고, 여러 개의 총집에 3자루의 피스톨을 소지하고 다녔는데, 적절한 공격 전술을통해서 권총을 효율적으로 활용하였다.
이후 16세기 후반에 새로운 격발장치가 개발되면서 기병용으로서 활용이 더욱 늘어났고, 권총시장도 활기를 띠기 시작했는데, 그 격발장치는 부싯돌식 격발장치(燧石式:Flint lock)이다. 부싯돌식 발화장치는 부싯돌을 이용하여 발화시키는 방식으로 권총의 사용을 더욱 간편하게 하였다.
17세기 이후 200여 년간 사용된 수석식(燧石式) 권총수석식 권총은 17세기 부싯돌식 격발장치(燧石式:Flint lock)가 개발되면서 사용되었다. 부싯돌식 격발장치는 17세기 전반 스내펀스 격발장치(Snaphance lock)가 발전하여 19세기 뇌관식 격발장치가 등장할때까지 200여 년간 총기 격발방식의 대표로 자리 잡는다.
부싯돌식 격발장치의 시초는 1580년 경 스페인에서 등장한 미클렛 발화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스내펀스격발장치는 총기 발달사에 한 획을 그은 획기적인 방식이라 할 수 있었다. 기존의 화승식 격발장치(Matchlock)는 점화약의 발화에 실패하는 일이 자주 일어났으며, 바퀴식 방아틀 격발장치(Wheel lock)는 제조단가가 지나치게 높아 대량생산에 적합하지 않았던 것이다.
스내펀스 격발장치는 부싯돌을 부시쇠에 부딪쳐 일어난 불꽃으로 점화약의 발화를 일으키는 방식으로불을 피우거나 담뱃불을 붙이는 등 일상생활에서 쓰이던 기술을 총기에 응용한 것이다. 이 스내펀스 격발장치는 이후 부싯돌식 격발장치의 기초를 마련했다.
스내펀스 격발장치가 총기를 발사하기 전에 화문(화약접시)에 달린 화문개(화약접시 뚜껑)를 한쪽으로 젖혀 점화약이 발화될 수 있도록 한 데 반해, 미클렛에서는 화문과 화개가 일체화되어 미리 젖혀진 공이치기가 아래를 내려칠 때의 힘으로 화개가 열리도록 개량한 것이다. 부싯돌식 격발장치의 개발자는 프랑스 노르망디 지방 리지외(Lisieux) 출신의 총기 기술자 마린르 부르주아(Marin le Bourgeoys)로 알려져 있다. 이장치를 이용한 총기는 17세기 초반 프랑스 왕실에서 처음 소개된 이후 점차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수석식 권총의 작동원리는 다음과 같다. 먼저 공이치기가 뒤로 젖히면 공이치기 하단부의 원통형 받침대가반쯤 회전하며 안쪽에 장착된 납작한 판형 스프링의 길게 뻗은 부분을 위로 올려 스프링을 압축하게 된다.이때 단발자의 앞쪽 끝이 공이치기 하단 기부의 홈에 걸려 공이치기를 젖혀진 상태로 고정하게 된다. 공이치기의 아래쪽 받침대 홈은 2개로 반작동 홈과 완전작동 홈으로 구성되어 있다. 방아쇠를 당기면 공이치기아래쪽 받침대 홈에서 단발자가 풀리면서 공이치기가 앞으로 회전하며 아래쪽을 내려치게 된다. 이때 공이치기에 장착된 부싯돌이 부시쇠를 치면서 불꽃을 만들고, 거의 동시에 화문개가 위로 열리면서 화문에 놓인 점화 화약에 불을 붙이는 것이다. 그 후 화구를 통해서 총열 뒤쪽의 약실에 장전된 발사약에 점화하여총알이 날아가게 되는 것이다.
부싯돌식 발화장치는 이후 총기 제작비용을 절감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는데, 18세기에 이르면 민간과 군에 이러한 권총이 널리 퍼지게 된다. 그러나 당시의 수석식 권총은 단발이라는 성능의 한계와 전투 중에는재장전이 불가능하다는 한계도 지니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술적인 큰 변화 없이도 200여 년간 사용되었다는 점은 이 총기의 우수성을 입증한다고 하겠다. 수석 발화식 총기를 제조하는 데 있어서 기술자들이 가장 신경 쓴 부분은 공이치기 아래쪽 받침대에 장착된 판형 스프링과 공이치기가 내려치는 각도였다. 이때문에 총기 기술자의 기술 정도에 따라 총기의 신뢰성이 달라지곤 했다.
뇌관식 권총수석식 권총은 오랜 기간 동안 실전에 사용되었지만 혁명적으로 발전된 전장 환경에서는 한계가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재장전이 느리고, 습기에 약하며, 부싯돌의 경우 자주 교체해야 하는 일이 생겼고, 재료로 쓰이는 강철은 담금질이 필요했으며 방아쇠를 당긴 후주 장약이 폭발하여 탄환이 나갈 때까지 걸리는 시간이 지연되어 명중률이 떨어졌던 것이다. 이러한 권총의 한계는 19세기에 뇌관식 권총, 총탄과 화약이 일체화된 약협(藥莢)의 등장으로 혁신적인 변화를 맞게 된다.
새로운 격발장치의 개발은 18세기 말부터 시작되었다. 프랑스 과학자인 콩트 베르톨레(Count ClaudeLouis Berthollet)가 폭발력이 강한 뇌산염(雷酸鹽)을 이용하여 수차례의 실험에서 시작했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스코틀랜드 성직자였던 존 포사이스 박사(Reverend Alexander John Forsythe)의 뇌산염과 수은을 이용하여 여러차례 실험을 하였고 이를 토대로 1820년경 뇌관식 격발장치(雷管式 : Percussionlock)를 발명함으로써 권총의 성능은 더욱 발달되고 활용성도 커졌다.
이 격발장치는 소량의 뇌산염을 얇은 금속관에 넣은 후 이것을 화구에 올려놓은 뒤 공이치기로 충격을 가하는 방식이다. 이 방식은 이후의 충격식 뇌관과는 다르지만 무기의 발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그리고 마침내 19세기 초에 현대식 소화기의 진보에 중요한 역할을 한 충격식 뇌관이 개발되게 된다. 충격식 뇌관은 영국인 조슈아 쇼(Joshua Shaw)가 1814년 개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충격식 뇌관은 작은 황동 그릇에 수은과 뇌산염을 같이 넣고 총의 공이치기 아래쪽에 있는 화구 꼭지에 올려놓는다. 방아쇠를 당겨 공이치기가 이 황동 그릇을 뭉개면 충격화약이 발화하고, 화구 꼭지 내에 있는 화염구를 통해 일시적인불꽃을 전달해 약실에 있는 주 장약을 태운다. 뇌관식 방식은 수석식 총에 비해 많은 장점을 지녔는데 악천후에도 사용이 가능했으며, 격발에서 탄환이 총구를 떠나기까지의 준비과정에 걸리는 시간이 매우 짧아져권총의 정확도가 더욱 높아졌기 때문이다. 특히 격발 장치의 크기가 작아져 권총의 크기가 눈에 띠게 줄어들었기 때문에 코트 주머니에 숨겨 다닐 수 있는 정도의 권총도 제작되었다. 이는 권총의 호신용 무기로서의효용성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충격식 뇌관을 활용한 다양한 형태의 권총들이 개발되어 사용되었고, 인기도 높았다. 이러한 뇌관식 권총은 회전식 탄창을 가진 리볼버에 이르러 권총은 더욱 작아지고 늘씬해지며 위력적인 성능을 가지게 된다.19세기 초에는 뇌관식 격발장치(Percussion lock)가 개발되어 권총의 성능은 더욱 발달되고 활용성도 커졌다. 수은과 뇌산염을 이용한 충격식 뇌관장치가 장착된 뇌관식 권총은 기존의 수석식 총보다 간편하고, 크기도크게 줄어 효용성이 높아져 전 세계로 보급되었다.
연발식 권총의 등장19세기 초반에 처음 등장한 초기 형태의 리볼버는 여러 개의 총열이 원통형으로 결합되어 몸통에 부착된것으로 발사할 때마다 이 총열 뭉치를 돌려주어야 했다. 조악하기는 하지만 최초의 수동식 연발 사격장치이다. 이후 회전식 탄창에 탄환과 화약을 하나로 묶은 탄약포를 장전, 탄창을 회전시키면서 사격하는 근대적인 형태의 연발식 권총이 개발하면서 이런 불편은 사라지게 되었다. 1835년 새뮤얼 콜트(Samuel Colt)는 격철(擊鐵)을 세우면 회전탄창이 회전되는 싱글액션 장치(회전식 탄창)을 개발하였다.
콜트는 1814년 7월 19일 코네티컷주 하트퍼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크리스토퍼 콜트가 운영하는 직물공장에서 일하던 콜트는 16세에 선원이 되어 인도로 항해하던 중에 회전식 연발 권총을 설계해 귀국 뒤에 특허를 얻었다. 콜트는 이어 본격적으로 총포 사업에 뛰어들었다. 1836년 뇌관식 회전권총인 패터슨 모델을고안해 특허를 얻은 그는 이것을 기반으로 뉴저지주에 콜트 특허 무기 제조회사를 설립했다. 그러나 콜트사의 6연발 권총에 대한 시장의 반응은 미지근했고, 1842년에 회사는 문을 닫았다. 그러나 콜트는 좌절하지 않았다. 그는 1847년에 구경 0.44인치 6연발 워커권총을 개발했고, 그 뒤 드러군(1847), 네이비(1857),아미(1860) 등 각종 권총과 회전 탄창 라이플을 개발했다.
이들 권총은 군대와 민간에 호평을 받으며 북아메리카와 유럽에 회전탄창식 리볼버가 퍼지는 데 기여했다. 한편 19세기말에 이르러 긴 시간과 손이 많이 갔던 리볼버의 장전 방식은 총탄과 화약이 금속제 또는 종이 재료로 만들어진 탄피와 일체화된 현대적 의미의 약협의 등장으로 바뀌게 된다. 약협은 1812년 스위스의 발명가 사무엘 요하네스 파울리(Samuel Johannes Pauly)가 처음 만들었다. 1850년대에 이르면 스미스 앤웨슨(Smith & Wesson)에 의해 약협을 사용하는 리볼버가 최초로 등장하고 S&W의 특허기간 만료 후 콜트도 이 대열에 동참하게 된다. 새로운 장전방식의 권총은 초기의 핀파이어(Pin-fire, 탄피 바닥에 있는 중앙부분의 뇌관을 건드려야 발사되는 방식) 격발방식에서 림파이어(Rim-fire, 탄피 바닥의 측면부분이 뇌관이므로 이곳을 건드려야 발사되는 방식)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센터 파이어(center-fire, 탄피 바닥의 중간부분에 있는 뇌관을 건드려야 되는 방식) 격발방식으로 발전하는데, 이후의 리볼버는 제작기법과 조준기구 및기계적 구조의 변화에 발전방향이 맞춰졌으며, 기본적인 작동 원리는 지금까지도 큰 변화가 없다.
이후 권총의 수요는 미국 남북전쟁과 서부 개척시기를 거치면서 폭발적으로 늘어났고, 또한 성능 개량도급속하게 이루어졌다. 19세기 미국의 서부지대는 무법상태였다. 1850년대까지 텍사스주에는 성인 남자 수만큼 권총이 흔하게 돌아다녔다. 1850년부터 1890년까지 2만 명 이상이 거리에서 일대일 결투로 목숨을 잃었다. 당시 명성을 날린 총잡이로 와이엇 어프(Wyatt Earp), 팻 개릿(Pat Garrett) 등이 있다. 이런 이유에서서부시대의 거리 결투는 할리우드 영화 제작자들에게 가장 인기 높은 주제가 되기도 했다.
당시 콜트사에서 개발한 SAA(Colt 1873 single action army)는 ‘서부를 정복한 권총’이라 불리며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이 총이 최초 제작된 것은 1873년이다. 그 뒤에 개량을 거듭하여 100년 이상 판매되어 오고 있는데, 당시 미군의 제식권총이기도 했다. 연발식 권총이 인기를 얻은 것은 휴대가 간편하고,손쉽게 연속 사격할 수 있다는 점 때문이다. 물론 19세기 이전에도 연발총을 개발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고민했었다. 다만 기술적인 한계로 인해 쉽게 개발할 수 없었다. 이후 권총은 회전식 권총(리볼버)과 자동식 권총(피스톨)의 두 유형으로 크고 작은 변화들을 가지고 오늘날까지 다양한 모습으로 발달하였다.
연발식 권총의 원조, 삼안총(三眼銃)우리나라에도 연발총 개념을 염두에 두고 개발된 화기가 있는데 바로 삼안총이다. 삼안총은 기본적으로불씨를 손으로 점화해서 탄환을 발사하는 지화식(指火式) 화기의 일종이지만, 하나의 총신에 세 개의 총구멍 또는 세 개의 총신이 하나의 손잡이(柄部)에 묶여져 있는 독특한 형식의 화기이다. 이러한 구조적인 특징 때문에 ‘삼안총(三眼銃)’, ‘삼혈총(三穴銃)’이라는 명칭이 붙여지게 되었다. 보통 인마(人馬) 살상을 주목적으로 사용되었으나 전투・훈련 시에는 소리를 이용한 신호 수단으로도 사용되었다.
삼안총은 원래 중국에서 사용해 온 화기로 임진왜란중에 중국으로부터 도입되어 사용되었다. 임진왜란 때조선군은 일본군의 조총을 이용한 보병전술에 맥없이 무너졌다. 초기 전투의 경험을 토대로 피아(彼我) 화기의 성능상의 우열과 전술상의 차이를 비교적 정확하게 파악한 조선은 국난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일본과 명나라의 선진화기를 도입하는 것이라고 판단하고 이를 위해 노력하였다. 당시 명나라 군은 대장군(大將軍),불랑기(佛狼機), 멸로포(滅虜砲), 호준포(虎蹲砲), 백자총(百子銃), 삼안총(三眼銃), 쾌창(快槍), 조총(鳥銃)등 다양한 화기를 장비하고 있었고, 명나라 군은 이들 화기를 활용하여 평양성 탈환전투에서 승리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조선은 명나라 군으로 부터 삼안총, 호준포, 백자총통, 불랑기 등을 적극적으로 도입하여 전란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삼안총은 이후 구한말까지 널리 제작되어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데, 1808년에 발간된 〈만기요람(萬機要覽)〉에 기록된 각 군영의 무기 재고상태를 보면 훈련도감에 153점, 어영청에 60점의 삼안총이 장비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삼안총은 일반 총들과는 다른 연발총 개념이 적용된 화기로서 다음과 같은 구조적인 특징을 지녔다. 먼저 삼안총은 기존의 총들과는 다른 다관식(多管式) 화기이다. 기존의 총(총통)들은 모두 하나의 총신으로 구성되어 있고, 화약과 발사물(화살 내지는 탄환)을 총구 쪽에서 장전한 다음 심지에 불을 직접 점화하여 발사하게 되는데 재장전 후의 발사과정도 이러한 과정을 반복해야 하였다. 총(화기)을 한 번 발사한후 두 번째로 발사할 때까지는 몇 분의 시간이 소요되어 사격 속도가 극히 느릴 뿐만 아니라 일단 발사한후 재장전하는 동안 병사가 적의 공격으로부터 무방비 상태에 놓이게 되는 취약점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조선은 한 번에 다량의 화살을 발사할 수 있는 기술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고, 이러한 노력의 결과 세종 때에 ‘일발다전법(一發多箭法)’ 기술의 완성되었던 것이다. 이후 발사물이 화살에서 탄환으로 대체되면서이러한 기술적 노력은 기존의 총신 세 개를 병렬로 연결함으로써 더욱 효과를 높이고자 했다. 이것이 바로삼안총이다.
삼안총이 지니는 또 하나의 특징은 총신이 매우 짧고 가벼워 기병용(騎兵用)으로 사용하기에 편리하다는 점이다. 1605년, 순변사 이시언(李時彦)이 선조에게 “삼안총이 말 위에서 쓰기에 아주 좋으며 적을 두렵게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하였다. 기병은 상대적으로 화기 사용에 있어서 많은 제약 요소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매번 장전한 후 발사하는 방식의 화기 보다는 한꺼번에 세 개의 총신에 장전한 후 세 차례에 걸쳐 연속 사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삼안총은 기병 전술운용에 있어서 매우 유용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조선 후기무예교범서인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의 ‘마상재(馬上才)’에도 바로 삼안총이 사용되었던 것이다. 마상재는 기병들이 말 위에서 무기 사용과 몸동작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도록 훈련시키기 위해 고안된무예였다.
이렇듯 삼안총은 총열이 짧고 가늠쇠가 없기 때문에 사거리가 짧고 정확도도 떨어지는 단점도 있으나 제작이 비교적 쉽고 말 위에서도 쉽게 사용할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기병용으로 널리 사용되었다. 특히 백병전을 펼칠 때 화약이 떨어지게 되면 타살무기로도 활용이 가능하기 때문에 구한말까지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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