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공군 2차 공세에 밀려 후퇴를 거듭하면서 마음고생이 심했던 백선엽 국군 1사단장(가운데)이 1951년 초 경기도의 한 초등학교에 마련된 사단본부에서 참모·고문관과 작전회의를 마친 뒤 촬영한 모습이다. [백선엽 장군 제공]
말라리아로 잠 못 든 새벽, 헤어진 노모·아내·딸 얼굴이 …
말라리아는 고통스럽다. 낮에는 오한이 심하게 닥친다. 그래도 1950년 12월 당시에는 겨울이라서 증상이 덜했다. 여름의 말라리아는 지독하다. 후퇴를 거듭하던 시점에 맞았던 말라리아는 때가 비록 겨울이었지만 심적으로 느끼는 고통의 강도는 여름보다 더했던 것 같다.
이럴 때면 늘 손에 조그만 버너를 들고 나타나는 사람이 있다. 낙동강 전선에서부터 국군 1사단에 배속돼 늘 나와 함께 생활하던 미군의 메이 중위였다. 그는 내 막사로 들어와 먼저 버너에 불을 피운다. 버너 밑에 달려 있는 조그만 펌프를 밀고 당기는 일을 반복하다 보면 불이 피어 오른다. 이어 그는 조그만 코펠을 올려놓고 물을 끓였다. 그러고서는 조그만 잔에 커피를 타 왔다.
“좀 어떠시냐. 뜨거운 커피를 마시면 좀 진정이 될 것”이라고 위로를 건넸다. 그가 타주는 커피는 적잖은 위안이었다. 차가운 겨울에 찾아온 말라리아의 오한이 좀 가시는 기분이 들고는 했다.
국군 1사단에는 미군 고문관들이 많았다. 포병과 공군 연락 장교는 당연히 미군이었다. 그 당시 한국군은 이 분야의 자체 역량을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통신·정보·병참 지원을 하는 후방 고문 등도 미군이었다. 사단은 종별 보급 명칭을 ‘클래스(CLASS)’라 부르는데 1이 식량, 2가 의류, 3이 기름, 4가 비품, 5가 탄약이다.
당시 국군 1사단은 미군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다. 각 분야의 미군 고문관들이 사단에 배속돼 8군 사령부 등과의 교신을 통해 각 분야의 지원을 중개했다. 나는 그래서 이 고문관들과 하루 종일 같이 지내는 편이었다.
전선의 부대를 시찰하거나 적정(敵情)을 직접 살펴보기 위해 전방의 고지를 둘러보는 일도 참모 및 미 고문관들과 함께했다. 아침에 기상한 뒤 이어지는 것은 각종 전선 보고를 검토하는 일이다. 그때 미 고문관들과의 회의가 시작된다.
사단 전체의 탄약과 식량에 관한 사항부터 병력의 이동·배치 등 모든 사항을 점검하는 자리다. 내가 미국인이 아닌 바에야 그들과의 소통이 완벽할 수는 없다. 그래도 정해진 군사 전문 용어가 있었고, 또한 그를 매일 반복해서 듣다 보면 귀에 매우 익숙해진다. 소통에는 큰 지장이 없었다.
사단의 인사 정보 작전 후방을 담당하는 한국 참모진과의 회의도 수시로 열린다. 정황에 따라서는 해당 분야의 참모만을 직접 부르거나 찾아가 즉석에서 회의를 한다. 이러다 보면 눈코 뜰 사이 없이 하루가 지나간다.
사단이 적에 밀려 후퇴하는 중에는 마음이 더 바빠진다. 병력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해 절치부심해야 한다. 적이 어디쯤 오고 있는지 파악하고 그에 대비해 여러 가지 작전 계획을 수립해야 한다. 모든 신경을 이곳에 집중하다 보면 하루의 해는 금세 서산 너머로 사라지고 만다.
나는 밥을 잘 먹고, 잠도 잘 자는 편이다. 당번병이 가져다 주는 식사는 대개 10분이면 뚝딱 해치운다. 전쟁 중에 익혔던 식사 습관이라서 지금도 밥을 빨리 먹는 편이다. 요즘에도 설령 격식 있는 자리에 나간 경우라도 나는 음식을 금방 먹어 치운다. 같은 자리에 앉았던 사람들이 조금 이상하게 생각할 정도다. ‘저 노인, 식사 한번 빨리 하는구먼’이라는 눈치다. 전장에서 익힌 습관은 아주 오래 이어지는가 보다.
전쟁 중의 사단본부는 흔히 주둔한 지역의 학교 건물에 차려진다. 내 숙소는 보통 선생들이 숙직을 하는 조그만 방에 마련한다. 학교 뒤편의 조용한 선생 숙직실에 들어가는 시간은 대개 밤 11시쯤이다. 분주하기만 했던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나름대로 혼자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유일한 때다.
중공군의 공세에 밀려 사리원과 임진강으로 후퇴했을 당시 말라리아를 앓았던 나는 늘 부관이 가져다 준 말라리아약 키니네를 한 움큼 집어삼킨 뒤 잠에 들었다. 그래도 가끔 덜덜 떨리는 것을 느끼면서 잠에서 깼다. 자리에 누워서 올려다보는 창에는 늘 어둠이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 동이 트기에는 아직 이른 새벽녘이었다.
때로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많이 자제하는 편이지만 이때에는 개인적인 생각을 하게 된다. 전쟁이 발발하던 50년 6월 25일 집을 나서면서 헤어진 노모와 아내, 그리고 세 살 난 딸의 안위가 우선 걱정이었다. 그들의 얼굴이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애써 그런 생각들을 지우려 노력했다. 전쟁 통에 지휘관이 가족 생각에만 파묻힐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런 말이 있다. ‘창을 베고 누워 아침을 기다린다(枕戈待旦)’. 그때 나와 전선을 함께 지켰던 모든 군인들, 그들의 심정은 바로 이와 같았을 것이다.
백선엽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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