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지식을 "116"호랑이 해에 본 호랑이 [중앙 일보]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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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월 1일 1시 3분 입력 / 수정 2010년 1월 1일 2시 56분
경인 년의 경은 오행 중 금 ... 금은 흰색에 해당돼 올해가 백호 해 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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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 (庚寅) 년 호랑이 해가 밝아옵니다. 단군 신화부터 88 올림픽 마스코트 호돌이까지 호랑이는 한국인의 삶과 문화에서 빼놓을 수없습니다 서울. 최근 발간된 책 『십이지신 호랑이』(생각의 나무), 국립 민속 박물관과 서울대 수의학과 대학이 공동 주최한 국제 학술 대회 '의 삶, 인간의 삶'자료집, 그리고 국립 민속 박물관 천진기 민속 연구 과장의 도움 호랑이 을 얻어 호랑이 이야기를 문답으로 풀어 봅니다.
이경희 기자
문 = 십이지 (十二支) 중 호랑이띠의 특징은.
답 = 우리나라 사람들은 띠 동물의 생태적 특징을 사람의 성격 · 운명과 결부시켜 풀이하는 문화를 갖고있다. 호랑이는 동물의 왕으로 모든 동물에게 위협의 대상이된다. 그래서 호랑이띠는 남의 밑에 들기 싫어하는 성격에 통솔력이 강하다고 풀이된다. 옛날엔 농작물에 피해를주는 야생 동물을 퇴치하기 위해 호랑이 똥을 뿌려 놨다. 호랑이를 무서워하는 동물들이 그 똥만 보아도 도망쳐 서다. 그 정도로 무서운 백수의 왕이기에 옛날 사람들은 '호랑이띠가있는 집안은 짐승이 안된다'고했다. 호랑이는 예외적인 경우를 빼곤 혼자 살아간다. 수컷은 교미가 끝나면 제 영역으로 돌아가고, 새끼 역시 생후 2되면 어미에게서 냉혹하게 쫓겨난다 년이. 피를 나눴다하더라도 아비의 영역에 잘못 들어갔다가 죽임을 당할 수있다. 그래서 '호랑이띠는 자식 복이 없다'고했다. 호랑이는 야행성 동물이다. 망막에 색깔을 감지하는 원추 세포는 없지만 명암을 느끼는 봉세포가 많아 희미한 빛만으로도 물체를 판단할 수있다. 밤이 돼야 기백을 뽐낼 수 있기에 '남자는 밤에 태어나는 게 좋다'는 속설이있다 호랑이띠. 여자는 그 반대로 봤다. 여자가 호랑이의 거친 성정이 발휘되는 밤에 태어나면 더 거세지 리라는 관념 때문이다. 띠 궁합에서 호랑이띠와 닭띠는 원진 (元嗔서로 꺼리는 궁합) 관계라 서로 맞지 않는다고한다. 이 역시 호랑이의 야행성과 관련된 해석이다. 옛 사람들은 호랑이가 닭 울음을 가장 싫어한다고 여겼다. 닭이 울면, 즉 날이 밝으면 호랑이가 활개 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문 = 경인 년이 백호 띠 라는데.
까치 호랑이. 19 세기, 종이에 채색, 116.5X82cm, 삼성미술관리움 소장. 소나무 위에 앉은 까치가 호랑이에게 말을 거는 듯하다. 새해가되면 까치 호랑이 그림을 내걸어 액운은 물리 치고 즐거운 소식이 찾아 오길 기원했다.
답 = 전통적으로 띠 동물을 색깔로 표현하는 것은 '백말띠'정도였다. 현대에 와서 '황금 돼지'라는 등의 색깔로 구분하는 풍속이 생겼다. 육십 갑자가 한차례 돌아가는 동안 각 띠는 다섯 번 돌아온다. 각각 황 (黄) · 청 (靑) · 백 (白) · 적 (赤) · 흑 (黑)의 오방색에 맞출 수있다. 경인 년의 경 (庚)은 오행 중 금 (金)이라 흰색에 해당한다. 그러니 흰 호랑이라 해석할 수있는 셈이다. 흰색은 우리 민족이 태양의 색이라 여겨 좋아했다.
문 = 민화에서 호랑이와 까치는 왜 함께 등장 하나.
답 = 정초엔 궁궐부터 민가까지 호랑이의 그림을 대문에 붙여 나쁜 귀신의 침입을 막는 풍속이 있었다. 백수의 왕인 호랑이는 능히 벽사 (僻邪사악한 기운을 물리침)에 효력이 있으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새색시의 가마엔 호피나 호피 그림이 그려진 담요를 씌우고, 새신랑은 호랑이 발톱을 지녀 사악한 기운을 물리쳤다. 집에 호랑이 그림을 걸어두면 관직이 높은 귀한 아들을 얻는다는 믿음도 있었다. 방문이나 대문 위에 호랑이 뼈를 끈에 꿰어 걸어 두거나 베갯모에 호랑이 그림을 장식한 것도 벽사 용이었다. 그런 호랑이는 다른 소재와 결합돼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내곤했다. 호랑이와 매가 함께 있으면 풍 (风) · 수 (水) · 화 (火)에 의한 세 가지 재난을 면할 수 있다고 여겨 삼재부적으로 쓰였다. 새해 벽두엔 '까치 호랑이'그림을 많이 걸었다. 호랑이의 벽사 기능에 까치가 즐거운 소식을 전하라는 뜻 함께 담긴 것이다이.
문 = 한반도 에선 언제부터 호랑이가 살았나.
경인 (庚寅) 년은 백호의 해다. 용인 에버랜드의 백호가 늠름한 자태를 뽐내고있다. [중앙 포토]
답 = 호랑이는 북방 기원설과 남방 기원설이있다. 북방 기원설은 호랑이가 500 만 ~ 200 만 년 전 시베리아, 중국 북동부와 한반도 등에 나타난 것으로 본다. 이후 1000 년간 기후 변화로 먹잇감인 초식 동물들이 남하하자 호랑이도 따라 내려가면서 영역이 확장되었다는 것이다. 인도와 한반도에는 호랑이가 많았지만 인접한 스리 랑 카나 일본 등에는 호랑이가 없다. 이미 대륙에서 섬이 분리된 뒤에 호랑이가 남으로 내려 왔기 때문이라 해석된다. 반면 남방 기원설은 호랑이가 인도 차이나와 남중국에서 발원해 실크로드의 생태 통로를 따라 중앙 아시아와 시베리아 등으로 퍼졌다고 본다. 한반도에는 1 만 2000 ~ 1 만 1000 년 전쯤 호랑이가 살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한다.
문 = 한국 호랑이가 왜 '시베리아 호랑이'인가.
답 = 호랑이는 원래 단일 종이지만 지역에 따라 8 개 아종 (종을 세분한 분류 단위)으로 구분된다. 시베리아 호랑이 · 중국 호랑이 · 인도지나 호랑이 · 벵골 호랑이 · 수마트라 호랑이 · 자바 호랑이 · 발리 호랑이 · 카스피 호랑이 등이다. 한국의 호랑이는 학술적으로 그중 최대 아종인 시베리아 호랑이 (아무르 호랑이)에 속한다. 이전엔 조선 호랑이 · 만주 호랑이 등으로 부른 적도 있지만 학계에서는 이들이 국경을 달리할뿐 형태나 습성엔 차이가 없다고 보아 단일 명칭을 쓰기로했다. 시베리아 호랑이의 수컷은 전장 (주둥이 끝 ~ 꼬리 끝)이 태그를 웃돌아 남방산 중 덩치가 크다는 인도 벵골 호랑이 (285 ㎝)보다 크다. 한국의 호랑이는 밝은 황갈색의 푹신한 모피에 적당히 성긴 검은 줄무늬, 흰 이마에 새겨진 뚜렷한 임금 왕 (王) 자 등 늠름한 기품을 뽐낸다. 야생에서의 수명은 약 15 년. 호랑이는 한 골짜기에 한 마리만 산다는 말이있다. 동북 아시아에서는 300 ㎢ 당 1가 사는 것으로 조사됐다 마리. 하루에 80 ~ 100 ㎞를 걸으며 영역을 순찰하고, 보폭은 약 80cm 다. 4 ~ 5 분 멀리뛰기, 높이뛰기 분. 분 아래 절벽으로 뛰어내리는 능력도 있고 사냥감을 덮치는 순발력도 대단하지만 전력질주할 수있는 거리는 300m 정도로 지구력이 약한 편이다. 지형 지 물을 이용해 몸을 숨기며 목표물의 10 ~ 15m 근처까지 포복해 접근한 뒤 미동도없이 머무르다 결정적인 순간에 기습한다. 그러나 사냥 성공 확률은 20 %. 첫 공격에 실패하면 대개 재시도를하지 않는다. 초식 동물들의 뜀박질이 더 빠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열흘쯤 굶는 일도 다반 사다. 대신 큰 짐승을 사냥하면 한꺼번에 포식한다.
문 = 한반도에 남은 호랑이의 흔적은.
답 = 청동기 ~ 초기 철기 유적인 울산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국보 제 285 호)가 가장 오래된 호랑이 표현이다. 줄무늬 호랑이와 점박이 표범 등이 14 마리 나온다. 고구려 고분 벽화의 사신도 (四神图)에는 서쪽 방위를 지키는 신수 (神兽)로서 백호가 나타난다. · 좌 청룡 우 백호 · 남 주작 · 북 현무의 사신 중 호랑이를 제외하고는 상상의 동물이다. 신라 에선 십이지를 형상화한 토우의 하나로서 호랑이가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백제 유물로는 5 ~ 6 세기께 제작된 남성용 소변 용기 '호자 (虎子)'가있다. 세계 문화 유산으로 등재된 조선 왕릉에는 석호 (石虎)가 배치돼있다. 정식 왕릉에는 2 쌍, 사후 (死后) 왕으로 추존된 경우엔 1 쌍이 설치된다. 살찐 몸집에 얼굴이 큰 가분수형에 동그란 눈, 매부리코, 귀밑까지 올라간 입이 특징이다. 조선 시대 민화에도 많이 남아있다.
문 =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호랑이 기록은.
답 = 『삼국유사』의 단군 신 화다. 곰은 동굴 속에서 쑥과 마늘만 100 일간 먹으라는 계율을 지켜 사람이되고, 호랑이는 동굴을 뛰쳐나가 사람이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는 흔히 환웅으로 대표되는 청동기 천신 족이 호랑이 부족이 아닌 곰 부족과 혈맹을 맺었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런데 곰은 단군 신화 이후 그 흔적이 거의 사라지다시피했다. '곰 나루'라는 뜻의 백제 시대 지명 '웅진'정도가 남아 있긴하지만 곰과 관련된 고고 학적 증거물도, 설화도 나타나지 않는다. 반면 호랑이는 꾸준히 등장한다. 『조선 왕조 실록』에는 '호랑이'로 검색되는 기록만 635 건에 달한다. 단군 신화의 호랑이를 "문명 화를 거부한 생명과 야성의 상징"(이용주 전 성균관대 동아시아 학술원 교수) 해석하는 시각도있다이라. 호랑이는 중국이 퍼뜨린 유교적 문명과 질서에 대한 저항을 상징한다. 조선의 민중들은 문명에 길들여진 곰보다 길들여 지길 거부하고 야생으로 돌아간 호랑이로부터 뿌리를 찾으려했다는 것이다.
문 = 한국의 호랑이는 다 어디 갔을까.
답 = 1 세기해도 우리나라는 호랑이가 많기로 유명했다 전만. 지금의 교통 사고 사망률보다 호식 (虎食)으로 죽을 확률이 더 높았 으리라 추정될 정도다. 『조선 왕조 실록』에 따르면 태종 2 경상도에서 범에 물려 죽은 사람이 수백 명, 년 영조 30 년에 경기도 지방에서 한 달 동안 범에게 물려 죽은 사람이 120여 명이다. 영조 28 년엔 경복궁 후원에 호랑이가 들어왔다. 호환 (虎患)에 시달리던 조상들은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호랑이를 아예 신격 화의 대상으로 끌어올렸다. 산신의 전령, 혹은 산신으로까지 모셨다. 조선 초에는 왕이 호랑이 머리를 놓고 기우제를 지내기도했다. 제왕 호랑이를 몰아낸 건 결국 사람이다. 고구려 벽화의 수렵도, 고려 '청동 수렵 무늬 거울'(숭실대 박물관 소장) 등에 호랑이를 사냥하는 그림이 나온다. 호랑이 사냥이 국가적 차원에서 체계화된 것은 조선 시대에 이르러 서다. 호랑이 포획을 전문으로하는 군사 조직 '착호군'을 조직하고 호랑이를 잡으면 포상하는 '포호포상제'도 마련했다. 호랑이를 많이 잡아 그 가죽을 진상한 지방 수령은 곧바로 승진할 수 있었다. 조선 후기 들어선 조총을 사용하는 포수가 호랑이 사냥을 주도했다. 숙종 22 년에는 평안도의 착호아병 (호랑이 사냥 전문 병사) 만 1 만 1000 명이었다. 호랑이가 절멸하게 된 것은 일제 때문이다. 호환을 없애준다는 핑계로 토벌대를 만들어 신식 고성능 총으로 사냥에 나섰다. 조선 총독부 통계 연보 중 기록이 남아있는 것만 합하면 18 년간 호랑이 97 마리, 표범 624 마리가 포획됐다. 기록이없는 기간까지 감안하면 호랑 이만 300 두 이상 포획 되었으리라 추정된다. 1940 년 한 마리가 포획되었다는 기록이 한국 호랑이의 마지막 흔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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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희 기자 [dungl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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